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80_0020_0020 


평정산산성(平頂山山城)


형태사항 : 동서 길이 840m, 남북 너비 400m, 둘레 3,183m 18점 

출토지 : 요녕성 본계시 평정산산성(遼寧省 本溪市 平頂山山城)


https://bit.ly/3pIMf95     https://bit.ly/3pJOsB8



조사내용


2002  본계시박물관


(本溪市博物館) 5월 본계시 평정산삼림공원(本溪市 平頂山森林公園)이 평정산 위에 정원(園林)을 건설할 때, 애벽활구(崖壁豁口)와 완만한 비탈지대에서 성벽을 발견함. 본계시박물관은 이 소식을 듣고, 성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고, 고대산성으로 확정함.


2008  본계시박물관


(本溪市博物館) 6월에 양지룡(梁志龍), 근군(靳軍), 위해파(魏海波), 마위(馬毅), 이용(李勇), 왕빈(王斌) 등에 의해 조사됨. 산성에서 시공건설을 진행하다가, 고구려, 금, 명대 유물을 발견함. 본계시박물관에서 산성에 대해 실측 등 상세한 조사를 진행함.


梁志龍·馬毅가 2009년에 「辽宁本溪市平顶山高句丽山城调查」『东北史地』 2009-5에 발표함.


 

구조특징

 

산성은 평정식산성이고 평면은 불규칙한 장방형임. 성벽, 성문, 각대(角臺), 요망대(瞭望臺), 건물지, 저수지, 우물, 계단식 밭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창, 화살촉, 손칼, 도끼 등 철기와, 호, 단지, 동이(盆) 등의 구연부, 기와 등이 출토됨.


성벽은 산 정상부 가장자리에 축조함. 성벽은 돌로 축조하였는데, 성돌은 대부분 자연석괴이고, 일부 성돌에만 가공한 흔적이 있음. 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인공적으로 쌓았는데, 산세가 험한 곳, 즉 우뚝 솟은 암벽이 있으면 그 암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면서 성벽을 축조하지 않음. 체성(體城)은 약하고 조잡하게 쌓았으며 체성 일부분은 내·외벽면이 있음. 일반적으로 성벽은 기단부 약 4m, 정상부 너비 약 3m, 가장 높은 성벽의 높이 2m임. 산암활구에 축조된 성벽은 대부분 외벽만 있고, 외벽 안쪽으로는 경사진 산비탈이 접해 있음. 외벽과 산비탈 사이에 흙과 돌을 채워 넣어서 높이를 맞추었는데,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구간은 높이가 2m에 가까움.


남벽은 길이 1,217m에 절벽을 따라 뻗어 있고 비교적 구불구불함. 인공벽은 모두 15구간인데, 각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200m임. 남벽 절벽 외단(外端) 정상부의 일부구간에 돌로 축조된 성벽이 있는데, 높이는 비교적 낮음.


북벽은 길이 842m이고 절벽을 따라 뻗어 있으며 비교적 구불구불함. 인공벽은 모두 10구간인데, 각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300m임.


서벽은 길이 654m이며 주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음. 전체적으로 절각형(折角形)이고, 바깥으로 튀어 나옴. 인공벽은 남측 애활(崖豁)에서 2구간이 발견되었는데, 길이는 약 10m임.


동벽은 길이 470m임. 주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음. 전체적으로 약간 밖으로 휘었음. 인공벽은 모두 3구간인데, 각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95m임.


 

역사적 의미

 

평정산산성의 성벽축조방법은 고구려산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그 특징으로는

첫 번째, 성벽은 산비탈을 따라 경사지게 쌓아 올리는 일반적인 축조방식이 아니라 낮은 곳에 기초를 높이 쌓아 높은 곳의 성벽기초와 수평을 이루게 한 후 일치된 수평에서 동시에 위로 쌓아올림. 이것은 고구려 석축산성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축조방식임.

두 번째, 산성은 주로 험준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고 애벽(崖壁)의 활구(豁口)에는 벽을 쌓아 막았는데, 이 또한 고구려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임.

세 번째, 일부 성벽구간에서는 단지 외벽만이 보이고 내측에는 돌과 흙을 채워 넣어 산비탈과 접해져 있는데, 이러한 성벽의 모습은 환인 오녀산성 동벽 제 5·6·9구간의 축조방식과 유사함.

한편 평정산산성의 인공성벽은 투박하고, 성돌은 조잡하게 가공한 산돌이 대부분이며, 체성의 성벽이 비교적 좁고 낮음. 이러한 특징은 쐐기형 돌로 축조한 고구려산성의 성벽과 차이가 있음. 하지만 조잡하게 가공한 산돌로 축조한 고구려산성은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음. 신빈 오령산성의 성벽을 축조한 돌은 대부분 조석(條石)이고, 석재 대부분이 조잡하게 제작되었음(佟達, 1994). 대련 비사성(卑沙城)의 성벽은 청회색 석회암으로 축조함(許明綱, 1996). 수암(岫巖)에서 발견된 5좌(座)의 고구려산성 가운데, 3좌가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는데,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은 성벽 전부를 자연석으로 쌓았고, 청량산(淸凉山)산성과 마권자(馬圈子)은 대부분 불규칙한 자연석으로 성벽을 축조하였음(楊永芳·楊光, 1994). 이로 볼 때, 평정산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하였다고 볼 수 있음.


평정산의 산세는 고구려 초기 왕도로 산 위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산세와 매우 비슷함. 양자 모두 비교적 평탄한 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고, 정상부 주변 가장자리 아래는 대부분 높이 솟고 가파른 절벽인데, 성을 그 위에 축조함으로써 수비는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운 군사적 우세를 갖추게 됨. 고구려가 현재의 본계지구를 장악한 다음 평정산이 자연적으로 주의를 끌면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역사적으로 평정산산성은 시간이 흘러 많은 왕조를 거치면서도 계속 이용됨. 일부 성벽은 정상부와 기단부의 축조풍격이 같지 않은데, 평정산산성이 처음 축조된 후 후대에 계속해서 보축 및 중수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음. 평정산 정상부는 평탄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함. 또한 산 절벽이 험준해서 수비는 쉽고 적이 공격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군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아, 병가필쟁(兵家必爭)의 지역이 됨. 산 위에는 주로 고구려, 금, 명대의 유적과 유물이 있고, 원(元)대 만기의 유물도 출토되고 있음. 원조(元朝) 말기 홍건군(紅巾軍)의 봉기가 폭발하면서 요양행성지방정권이 사붕오열(四崩五裂)되었음. 이때 각 세력들은 각자 용병을 모집하면서 할거했는데, 평장(平章) 고가노(高家奴)가 평정산에서 병사를 모아 개인세력을 확대해갔음. 이에 명조(明朝)는 洪武 4년(1371) 대장 마운(馬雲)과 엽왕(葉旺)을 보냈는데,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평정산을 공파하였음. 고가노(高家奴)가 평정산을 점거했을 때, 산성 성벽에 대해 보축을 진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함. 이 외에도 평정산에는 근현대시기 유적도 많음. 러일전쟁시기에 러시아군이 산 위에 축조한 참호, 민국(民國)시기 산 위에 축조한 옥황묘(玉皇廟), 일통치시기에 축조한 토치카들(碉堡群), 해방 후 산 위에 축조한 텔레비전 송신탑과 방신(防汛)통신탑 등이 남아 있음.


축조연대에 관해 梁志龍·馬毅의 연구(2009)는 평정산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유물은 고구려인 이 산위에서 활동하였다는 물증이라고 함. 철제 창(矛)은 가운데부분 양측 칼날(刃)이 약간 들어가 있는데, 길림성 집안 판차령(板岔岭)에서 출토된 철제 창와 유사함. 철촉1은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사두(蛇頭)형 철촉들과 일치하고, 철촉2는 오녀산성 F37에서 출토된 보엽형 철촉과 유사함. 철제 손칼은 오녀산성철기교장(窖藏)JC:16 철제 손칼과 유사함. 고구려시기 토기편은 대부분 니질의 홍갈색과 니질의 회색이고, 일부는 니질의 홍갈색임. 일부 토기표면에는 홍색 유약이 한층 발라져 있음. 표면이 탈락되어 외부로 노출된 태(胎)는 회색이고, 모두 녹로제로 제작됨. 단지 구연부는 대부분 구순이 각이 졌고, 전연(展沿)이며, 목(頸)은 잘록한데,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단지와 유사함.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설두(舌頭)형 철촉과 전연단지는 모두 4기 문화층에서 발견되었는데, 4기 문화층의 연대는 5세기 전후로 추정됨. 그러므로 평정산산성의 연대도 대체로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가 요동군(지금의 遼陽市)을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대왕대임(金毓黻, 1941). 평정산에서 요동군소재지(지금의 요양시)까지의 거리는 동쪽으로 약 60㎞이고, 양자 모두 태자하 연안에 위치하고 있음. 이로 볼 때, 산성의 축조시간은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시기보다 이르지 않음. 문헌과 출토된 고구려유물의 연대를 종합하여 분석해 볼 때, 평정산산성 축조연대는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됨.


지명비정에 관한 연구로, 梁志龍·馬毅(2009)는 횡산성(橫山城)으로 비정함. 횡산(橫山)은 한어(漢語)명칭인데,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산의 형태와 관련이 있음. 즉 횡산(橫山)이란 이름은 산이 횡방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임. 평정산 꼭대기가 평탄하다는 점에서 “橫”자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볼 수 있음. 『資治通鑑』唐紀, 太宗中 정관 19년(645) 겨울 10월 기사에 “凡征高麗, 拔玄菟·橫山·蓋牟·磨米·遼東·白巖卑沙·麥谷·銀山·後黃十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횡산이 보임. 당군이 패배한 후, 횡산은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짐. 14년 후, 당군은 소규모의 동벌(東伐)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다시 횡산을 공격함. 『舊唐書』薛仁貴傳에는 ‘顯慶 4년(659) 설인귀 “又與梁建方, 契苾何力于遼東, 共高麗大將溫沙門戰于橫山, 仁貴匹馬先入, 莫不應弦而倒。高麗有善射者, 於石城下射殺十餘人, 仁貴單騎直往沖之, 其賊弓矢俱失, 手不能舉, 便生擒之”’라는 기록이 있음. 『資治通鑑』唐紀, 高宗上에는 ‘顯慶 4年 11月, 右领軍中郞將薛仁貴等與高麗將溫沙門戰于橫山, 破之’라는 기록이 있음.


 

자연환경


평정산산성은 본계시구 동남부에 위치한 평정산에 위치함. 평정산은 명산구(明山區) 동흥가도판사처(東興街道辦事處)에 속하는데, 현재 본계시 평정산배성삼림공원관리국(本溪市 平頂山环城森林公園管理局)에서 관리함. 평정산은 해발 661.2m로, 본계시구에서 가장 높음. 평정산 아래 동쪽은 팔도구(八道溝)인데, 심양~단동(沈陽~丹東) 고속도로가 구(溝) 동쪽을 지나고 있음. 평정산 서쪽은 전산구(轉山溝)임. 평정산에서 남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지점에 남천문촌(南天門村)이 있음. 시구(市區)에서 평정산으로 통하는 도로는 남천문 북쪽으로 올라가 산 정상부에서 서북쪽으로 꺾이고, 다시 동쪽으로 꺾임.


평정산 북쪽 아래에서 약 5㎞ 떨어진 지점에 태자하가 있음. 태자하와 평정산 사이의 평원과 비탈은 본계시 주요 가구(街區)임. 평정산은 산 정상부가 비교적 평탄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지세임. 정상부 네 주변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인데, 특히 동서 양측은 매우 가파르고, 남쪽은 약간 완만한 지세임. 평정산 남쪽에는 기복이 심한 많은 산들이 있음. 산 위에 나무, 식생이 무성한데, 현재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음.


유물정보


철모(鐵矛) 1점, 철촉(鐵鏃) 2점, 철제 손칼(鐵削) 1점, 철제 도끼(鐵铲) 1점, 토기편(土器片) 12점, 기와편(瓦片) 1점



참고문헌


· 金毓黻, 『東北通史』, 年代出版社, 1941

· 佟達, 「新賓五龍高句麗山城」『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楊永芳·楊光, 「岫岩境內五座高句麗山城調査簡報」『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許明綱, 「大連地區高句麗四座山城略考」『博物館研究』 1996-1, 1996

· 梁志龍·馬毅·王斌, 「遼寧本溪市平頂山高句麗山城調查」『東北史地』 2009-5,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본계 평정산 산성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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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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