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군사와 함께 당나라 군사에 맞서 싸우다 ( 672년 08월(음) )
한국사DB > 고대사료DB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제7 > 문무왕(文武王) > 고구려 군사와 함께 당나라 군사에 맞서 싸우다
八月, 攻韓始城·馬邑城, 克之. 進兵距白水城五百許歩, 作營. 我兵與髙句麗兵逆戰, 斬首數千級. 髙保 校勘 046等退, 追至石門戰之, 我兵敗績, 大阿湌曉川·沙湌義文·山世·阿湌能申·豆善·一吉湌安那含·良臣等死之.
校勘 046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保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는 侃으로 되어 있다.
8월에 〔당나라 군사가〕 한시성(韓始城)註 001과 마읍성(馬邑城)註 002을 공격하여 이겼다. 군사를 전진시켜 백수성(白水城)註 003에서 500보 쯤 되는 곳에 군영(軍營)을 만들었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高侃) 등이 물러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註 004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하여 대아찬(大阿湌) 효천(曉川)註 005, 사찬(沙湌) 의문(義文)註 006, 산세(山世)註 007, 아찬(阿湌) 능신(能申)註 008, 두선(豆善)註 009, 일길찬(一吉湌) 안나함(安那含)註 010, 양신(良臣)註 011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註 012
주
註 001 한시성(韓始城): 한시성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은데, 대체로 평양 인근의 대동강(大同江) 하류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병도, 1986, 119쪽; 손영종, 1997, 231쪽). 당군은 7월에 평양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었는데, 한시성을 8월에 공격한 것으로 보아 그곳이 평양에서 그리 멀리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군이 한시성과 마읍성을 함께 공격한 점에서, 한시성은 평양 외곽의 대동강 수로와 연관된 요충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86,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손영종, 1997, 『고구려사』 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註 002 마읍성(馬邑城): 마읍성의 위치는 막연히 평양 인근의 대동강(大同江) 하류 지역으로 추정되어 왔다(이병도, 1986, 119쪽; 손영종, 1997, 231쪽). 660년 백제가 멸망한 다음해인 661년에 당군은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당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읍산(馬邑山)을 탈취하고 진영을 구축한 후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마읍산은 공격하는 측에서 평양성을 포위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는 곳이었고, 반대로 방어하는 측에서는 평양성을 외곽에서 방어할 수 있는 주요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 사료를 통해 본 마읍산의 입지조건은 대동강 하구에서 평양성 사이에 위치하고, 평양성 서남쪽에 대동강 수로와 연결되는 곳이며, 대동강 북안에 위치하여 수륙 교통의 결절지였다. 이러한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마읍산의 위치를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떨어진 서학산(棲鶴山) 일대로 비정하는 연구가 제시되어 있다(이상훈, 2017, 313~314쪽). 이곳은 서학산과 정이산 자락으로 인해 대동강 수로가 500m 내외로 좁아지기 때문에 수로교통상 병목 현상이 발생하는 곳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북안과 남안에 방어 병력을 배치할 경우 적군이 수로를 손쉽게 통과하기가 어렵다. 또한 수도인 평양성, 서쪽 거점성인 황룡산성, 남쪽 거점성인 황주성 사이에 위치해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용이한 위치이기도 하다. 수나라와 당나라 모두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마읍산 일대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인 점을 통해 볼 때, 마읍산은 대동강 수로방어상 핵심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86,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손영종, 1997, 『고구려사』 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이상훈, 2017,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軍史)』 104
註 003 백수성(白水城): 백수성의 백수(白水)는 위에서 아래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천(泉)’을 ‘백수(白水)’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고, 백수산(白水山)과 천산(泉山)은 동일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민덕식, 1989, 163쪽). 대체로 백수성은 예성강(禮成江) 유역의 황해도 배천(白川)으로 비정되고 있다(김기웅, 1966, 24~27쪽). 한편 백수성이 황해도 석문(石門)과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여 재령강(載寧江)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영교, 2006, 230쪽; 최재도, 2015, 154~155쪽). 또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했던 천성도(泉城島)에 주목하여, 천성(泉城)으로 비정되는 파주 교하의 오두산성(烏頭山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2016, 109~110쪽). 이렇듯 백수성의 위치는 다양하게 비정되고 있지만, 당시 전투 상황을 감안할 때 대동강 이남, 그리고 한강 이북에 위치한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연구』, 아세아문화사
김기웅, 1966, 「배천산성 답사보고」, 『고고민속』 1966-1
민덕식, 1989, 「나·당전쟁에 관한 고찰」, 『사학연구』 40
최재도, 2015, 「한성의 고구려국 재검토」, 『동북아역사논총』 47
전덕재, 2016,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한국사연구』 173
註 004 석문(石門): 석문은 현재의 황해도 서흥(瑞興)의 운마산(雲磨山) 일대로 추정된다(이기동, 1987,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89쪽). 운마산에는 석문사(石門寺)가 있고, 서흥은 실제 당군이 평양에서 남하하는 경로상에 위치하기 때문에 석문의 위치로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註 005 효천(曉川): 효천은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효천이 대아찬으로서 사찬 2명, 아찬 2명, 일길찬 2명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석문전투에 참가한 신라군 부대 가운데 하나의 단일 부대 지휘관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석문전투(石門戰鬪) 직전에 발생한 백수성전투(白水城戰鬪)에서 신라가 승리하고 그 기세를 타고 당군을 석문까지 추격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효천이 이끄는 신라군 선발대 혹은 선봉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의 효천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006 의문(義文): 의문은 사찬으로서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효천(曉川)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7 산세(山世): 산세는 사찬으로서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대아찬 효천(曉川)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8 능신(能申): 능신은 아찬으로서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石門戰鬪)투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효천(曉川)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09 두선(豆善): 두선은 아찬으로서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효천(曉川)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10 안나함(安那含): 안나함은 일길찬으로서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효천(曉川)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11 양신(良臣): 양신은 일길찬으로서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군과 싸우다가 효천(曉川)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외의 행적은 더 이상 알 수 없다.
註 012 고간(高侃) 등이 후퇴하자 …… 죽임을 당하였다: 문무왕 12년(672)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石門戰鬪)에 대한 내용은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下)조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석문전투에서 처음에는 신라군이 승리하였다. 신라의 장창당(長槍幢)이 선전하여 당군 3,000명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 승리는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보다는 전공에 따른 포상에 관심이 몰려 있는 신라군들의 이기심을 자극하였다. 혁혁한 공을 세운 장창당에 대한 시기심이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결해 있던 부대들은 각 부대별로 진영을 갈라 분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노려 당군이 급습하자, 신라군은 크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본 기록은 석문전투의 경과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당군이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함락하고, 남진하여 백수성(白水城)에서 500보 정도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신라군이 고구려부흥군과 연합하여 당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당군이 달아나자, 신라군이 석문(石門)까지 쫓아가 싸우다가 도리어 당군에게 크게 패하였던 것이다. 앞서 당군이 후퇴하자 신라군이 석문까지 추격하였는데, 이는 당군의 유인책으로 파악된다. 석문전투는 신라가 장창당을 비롯한 중앙의 여러 군부대를 대거 투입한 일대 결전이었고, 나당전쟁 개시 이후 규모를 갖춘 최초의 정면 승부라고 평가된다(서영교, 2006, 138~152쪽). 신라가 석문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신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였고, 전략을 수정하여 대대적인 축성(築城)을 단행하게 되었다(서인한, 1999, 132쪽). 한편 신라군이 내부의 공명심으로 석문전투에서 크게 패한 것은 분명하지만, 신라군이 당군과의 접전에서 결코 전력이 크게 약화된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이상훈, 2012, 124쪽). 최초 접전에서 승리한 것처럼 신라군이 야전(野戰)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신라군이 당군과의 정규전이나 정면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시각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석문전투 당시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元述)도 비장(裨將)으로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신라군이 패하자 원술도 전사하려 하였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淡凌)의 만류로 뜻대로 하지 못하고 경주로 귀환하였다. 김유신은 국왕에게 원술이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져버렸으니 베어야겠다고 하였다. 국왕의 만류로 원술은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김유신 가문에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이후 나당전쟁이 격화되고 675년에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가 발생하자, 이때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하지만 원술은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끝내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서인한, 1999, 『나당전쟁사』, 국방군사연구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연구』, 아세아문화사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고구려 > 멸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덕국 (報德國) - 민족문화대백과 (4) | 2024.11.05 |
---|---|
당나라·거란·말갈의 군사가 여러 성을 공격하다 ( 673년 (음) ) - 한국사DB (0) | 2024.11.05 |
(고구려)부흥군이 백수산에서 패배하고, 신라가 구원하다. ( 672년 12월(음) ) - 한국사DB (0) | 2024.11.03 |
연정토가 항복하다 ( 666년 12월 ) - 한국사DB (1) | 2024.11.02 |
연정토 (淵淨土) - 민족문화대백과 (0) | 2024.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