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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독립운동’에 나선 부산일보 구성원의 대반란
[인터뷰]이호진 부산일보 노동조합 위원장
고희철 기자 khc@vop.co.kr  입력 2011-12-02 12:28:48 l 수정 2011-12-02 13:04:01

“사장의 지시로 윤전기를 멈춰 신문 발행을 강제 중단시킨 사례는 전 세계에서 처음일 겁니다”

이호진 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장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날이 서 있었다.

11월 30일 발행 중단 사태는 부산일보 주식 100%를 소유한 정수재단과 부산일보의 해묵은 관계를 일순간에 전국적 관심사로 만들었다. 

부산일보 노조가 정수재단과 부산일보와의 ‘투명한 관계’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 이번 발행 중단 사태의 불씨. 정수재단에서 지난 2005년까지 이사장으로 재임한 것이 바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다. 

발행되지 못한 지난 30일치의 1면 사이드톱과 2면 박스 기사에는 “유력 대권 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가 정치 무대에 나선 만큼 신문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박 전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었던 정수재단과의 완전한 분리가 필수적”이라는 등의 내용이 실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박 전대표는 발행 중단 사태 다음 날인 1일 개국한 종편 4개사와 일제히 인터뷰를 하며 사실상 대권 행보를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수재단과의 관계 정리를 요구하는 노조의 입장을 담은 기사가 실리자 경영진은 이의 삭제를 요구했고 이정호 편집국장이 이를 거부하자 윤전기를 중지시켜 편집이 끝난 신문의 인쇄와 발행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다. 발행 중단 사태는 노조가 윤전기를 돌려 발행을 강행하는 역시 초유의 대응으로 하루 만에 끝났다.

이호진 부산일보노조(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위원장이 윤전기 스타트 키를 눌러 신문 발행을 강행하고 있다.있다.
이호진 부산일보노조(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위원장이 윤전기 스타트 키를 눌러 신문 발행을 강행하고 있다.있다. ⓒ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경영진, ‘정수재단과 부산일보의 관계 정리’ 기사 일방적 삭제 지시

1일 오후 이호진 언론노조 부산일보 지부장과 인터뷰를 통해 노조의 입장을 들었다. 이 지부장은 회사 징계위로부터 면직 처분을 받고 재심청구를 한 상태다. 이정호 편집국장 역시 대기발령을 받았다.

이 지부장은 “그간 노조는 정수장학회 및 경영진에 모든 절차를 통해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의 관계를 투명하게 만들 것을 촉구해왔다”며 “이를 위해 사장 선임권을 정수장학회가 포기하고 부산일보 구성원이 사장 후보를 추천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필 왜 지금 이 문제를 제기할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지부장은 “내년 2월 현 김종렬 사장 임기가 만료된다”며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편향성’ 시비를 벗고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사장추천제 도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2004년 총선의 경험을 털어놨다. 당시 총선에서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대표로 선거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로 인해 박근혜 대표와 ‘특수관계’에 있는 부산일보는 ‘공정성’에 의심을 받게 됐다. 박근혜 반대층에게는 “박근혜 대표에 편향된 보도를 한다”는 항의를 받고, 반대로 박근혜 지지층에서는 “역차별을 받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박 전 대표가 대선 후보로 내년 양대 선거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부산일보 구성원들은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을 ‘존립’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이 지부장은 전했다.

이 지부장은 “특정 정당과 인물에 편향돼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 언론의 생명력은 끝”이라며 부산일보 구성원들의 절박한 심정을 전했다. 이 때문에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보다는 ‘정수장학회가 부산일보 사장 선임권을 내려놓으라’는 요구에 강조점을 찍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 지부장은 회사 경영진들이 입버릇처럼 “우리가 박근혜 대표에게 해준 것이 무엇있냐” “사장이 싣고 싶은 기사 못 싣는 신문이 어디 있냐”는 말을 해왔다고 전했다. 편집권 독립성이 이미 직·간접적으로 위협받아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조의 사장후보추천제 도입 요청, 사측 거부

노조의 사장후보추천제 도입 요청에 사측은 거절로 일관했고, 결국 노조의 입장을 담은 기사의 게재를 ‘원초적인 방식’으로 제지했다.

이 지부장은 30일 상황에 대해 “1면과 사이드톱 2면 박스 기사가 이미 작성돼 편집까지 마쳤는데 경영진이 삭제를 일방적으로 편집국에 요구했고 국장이 이를 거부했다”며 “경영진은 편집권을 경영진에 포괄되는 일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 지부장은 30일의 결간 사태에 대해 “TV로 예를 들면 방송이 중단돼 까만 화면만 나온 것인데 이유를 떠나 독자와 시민들께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어 “경영진의 행태는 편집권 독립에 대한 심각한 유린으로, 부산일보 구성원들 사이에 분노와 배신감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결국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산일보 구성원들은 1일자 신문을 발행했다. 노조는 김종렬 사장이 ‘퓨즈를 끊더라도 노조 입장을 담은 신문을 내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발행 중단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이 지부장은 “부산일보에 김 사장의 몰상식한 지시에 응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며 “신문 발행을 정상화해 독자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노조는 김종렬 사장 퇴진을 주장하며 사장실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노조는 이번 기회에 김 사장을 임기에 앞서 퇴진시키고 사장후보추천제를 도입해 정수재단으로부터 부산일보의 독립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자는 데 구성원들이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노조는 이번 사태를 부산일보의 ‘제2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제1의 독립운동은 지난 88년 편집권장 선출제를 관철시킨 것이다. 부산일보는 87년 민주화운동의 물결을 타고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집국장 임명제를 대신해 기자들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를 도입해 편집권 독립을 이뤘다. 이 때문에 편집권 독립에 대한 부산일보 구성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히 높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에는 정수재단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룰 제도적 방안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사장후보추천제를 통해 신망받는 인사를 사장으로 세워 편집권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권력으로부터 공정성을 확보하겠다는 꿈에 부산일보 구성원들은 도전하고 있다.

이호진 부산일보노조(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위원장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호진 부산일보노조(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위원장이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언론노조 부산일보지부


부산일보, 박정희-박근혜 부녀와의 ‘악연’

잘 알려진 것처럼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516 쿠데타 세력은 정권을 찬탈한 이듬해인 1962년 부일장학회를 ‘헌납’ 받았다. 중앙정보부가 부산 지역 유지인 김지태 부일장학회 이사장을 밀실에 감금하고 재산을 강탈한 이 사건을 이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강압에 의한 강제 헌납’으로 규정했다.

박정희 정권에 넘어간 부일장학회가 516장학회와 정수재단으로 이름을 바꾸며 이어져왔고 아직도 부산일보 주식의 100%, 문화방송(MBC) 주식 30%, 각종 부동산 등을 소유하고 있다. 

박정희 ‘정’자와 육영수의 ‘수’자를 딴 정수재단은 지금까지도 부산일보에 대해 ‘사장 선임권’이라는 강력한 통제권을 갖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지난 2005년까지 정수재단 이사장으로 재임했고 지금은 최필립 씨가 이사장을 하고 있다. 최 이사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으로 사실상 박 전 대표의 ‘대리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때문에 박 전대표가 대선 후보, 나아가 대통령이 될 경우 간접적으로 특정 언론사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고희철 기자khc@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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