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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순신, 그는 누구인가
40여 해전에서 무패신화 일군 ‘불멸의 영웅’
2012. 01. 30   00:00 입력 | 2013. 01. 05   07:37 수정

이순신은 덕수 이씨 12대손이다.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은 그리 높지 않은 관직 생활을 했으며, 아버지 이정(李貞)은 관직에 출사하지 않은 평범한 선비였다. 이순신의 직계 조상 가운데 조선시대에서 눈에 띄는 발자취를 남긴 분은 7대조 이변(李邊)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인 이거(李琚)이다.
 


7대조 이변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인 이거는 사헌부 장령·이조 좌랑 등을 지냈는데 홍문관 대제학이나 이조 좌랑은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리는 매우 명예로운 관직이어서 조선시대에는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것보다도 더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증조할아버지인 이거는 호랑이 장령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당시 조선의 조정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분이어서 이순신이 관료 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그 명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漢城)의 건천동에서 태어났는데 현재 명보극장 근처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柳成龍)이 같은 동네에 살아 교분을 나눴는데, 이때 각인된 이순신의 사람됨에 대한 좋은 기억이 토대가 돼 이후 그는 이순신의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이순신이 무과(武科)로 전향한 것은 22세 무렵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형들을 따라 서당에 다니면서 문과(文科) 과거시험 준비를 했는데, 나름대로 자질이 있어 문과 시험을 보았어도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고 전해진다. 6년을 준비해 28세 때 처음으로 무과 시험에 도전했으나,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낙방했다. 그 후 다시 4년을 준비해 32세 때 무과 시험에 재도전해 총 합격자 29명 중 12등으로 합격했다. 

무과에 합격한 이후 처음 받은 직책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었다. 권관은 종9품의 벼슬로 오늘날로 위관급 장교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이순신은 초급 관료 시절부터 능력과 실력 그리고 도덕성을 인정받았다.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있을 때 감사 이후백(李後白)이 순시를 나와 변방을 지키는 관료들의 임무수행 상태를 점검했는데, 지적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 관리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는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순신의 업무 능력과 전투준비태세가 다른 관리들에 비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직속상관인 서익(徐益)이 아는 사람을 순서를 건너뛰어 승진시키려 한 것을 차단한 사례가 있었다. 진급 서열이 아래에 있는 사람을 승진시키면 마땅히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이 사건은 조정 안팎에 널리 소문났던 것 같다. 하급 관리로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직속상관의 의지를 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소문 때문인지 병조판서 김귀영(貴榮)이 자신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에게 시집보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정중히 거절했다. 관료사회에 막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이 권세 있는 집안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순신은 초급 관료 시절 고속 승진을 했다. 36세가 되던 해에는 전라도 좌수영에 소속된 발포(鉢浦)의 수군만호(萬戶)가 됐다. 수군만호는 종4품으로 오늘날 계급으로 해군대령쯤 되는 계급이다. 32세에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니, 4년이 못 돼 위관장교에서 대령까지 진급한 것이다. 발포 만호 시절에도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오동나무 사건이다. 발포의 관청 뜰에는 오래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직속상관인 전라 좌수사 성박(成?)이 이것을 베어 가서 거문고를 만들려고 한 것을 좌절시킨 사건이다. 대령급 지휘관이 직속상관인 소장급 수사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관료 생활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정의감이 남달랐던 이순신은 관료가 돼서도 이런 평소의 삶의 태도를 초지일관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직속상관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통제사 시절에는 수군의 전략을 두고 임금과도 갈등을 빚었다. 그 결과는 파직과 투옥 그리고 백의종군이었다. 이순신은 관료 생활 20여 년 동안 총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 처분을 받는 등 시련의 관료 생활을 했다.

정읍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 좌수사로 발탁된다. 정읍 현감은 종6품의 직책이고, 전라 좌수사는 정3품의 직책이니 7계급을 특진한 것이다. 파직과 백의종군 등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조선 조정은 무인 관료로서의 이순신의 실력과 능력·인품을 높이 평가해 이와 같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전라 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곧바로 전쟁준비에 돌입했다. 이순신의 전쟁 준비 백미는 거북선 건조다. 거북선에 돛을 달고 지자, 현자총통을 싣고 나가 사격훈련을 마친 날이 정확히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이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 좌수군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까지 전투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투 준비에 기초해 이순신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벌어진 7년여 동안 40여 회의 해전에서 전승무패의 승리 신화를 창출했다. 이런 전과를 바탕으로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역사의 주역이 됐으며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향년 54세였다. 

이순신은 실력이 있는 리더였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위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 또한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와 함께 했을 때 조선 수군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이뿐만 아니라 침략자 일본군에 대해서는 하늘을 대신해 철저히 응징함으로써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이순신은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살았던 고결한 인격을 지닌 전형적인 한국적 리더십의 표상이요 멘토다. 21세기 선진 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이 땅의 리더들이 이순신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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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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