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n7uERA

<5>전라 좌수사로 전격 발탁되다
실전 경험 풍부 ‘현감’서 ‘수사’로 7계급 특진
2012. 02. 06   00:00 입력 | 2013. 01. 05   07:39 수정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돼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13일이었다.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종6품 정읍 현감이던 자신을 7계급 특진시켜 정3품인 전라좌도 수사로 임명한 임금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6품인 현감은 군 계급으로 소령쯤 되는 계급이고 정3품인 수사는 소장쯤 되는 계급이니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옛 진남관 전경.



현재 진남관.


전라좌수영 고지도.


복원 예정인 여수 전라좌수영 모습.
 
언론과 비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사간원·사헌부 등에서 난리가 났다. 이와 같은 특별한 승진은 관료 사회의 인사 원칙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으니 부당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이미 1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정읍 현감으로 재임하고 있던 이순신은 1590년 7월 평안북도에 있는 고사리진 첨사로 임명됐고, 8월에는 같은 도의 만포 첨사로 임명됐는데 모두 취소되고 그대로 유임됐다. 첨사는 종3품으로 군 계급으로 준장쯤 되는 계급이니 종6품인 이순신을 6계급 특진시키는 일이어서 대간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때 인사안이 관철됐더라면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해를 넘겨 1591년 2월에는 진도 군수로 임명됐는데, 진도로 가는 도중에 현재의 완도인 가리포 첨사로 발령이 났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른바 수사(水使)에 임명됐다. 수사는 오늘날 함대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종3품 첨사로 임명하는 6계급 특진도 파격적인 인사라고 해서 대간들이 반대했는데,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7계급 특진에 해당하는 수사에 임명했으니 대간들이 극력 반대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금인 선조가 자신의 인사안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아주 강력한 의지로 이를 관철시켰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확인해 본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마라.” 이 글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간원에 대해 임금인 선조가 응대한 내용이다. 대간들의 비판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는 임금의 강력한 의지와 이순신이 이런 소문을 듣고 받게 될 마음의 상처까지를 걱정하는 임금의 배려가 느껴지는 자료다. 아마도 선조가 임진왜란에 대비해 행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것이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임명한 인사조치일 것이다.

이순신의 발탁은 어릴 적 친구였던 유성룡의 천거가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는데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인 1589년 1월 비변사에서 ‘불차탁용(不次擢用)’ 제도를 시행한다. ‘불차탁용’ 제도란 직책과 계급의 고하에 관계없이 유능한 무인 관료를 발탁해 채용하는 일종의 특별 인사채용 제도다. 이런 특별 제도가 시행된 배경에는 당시 조선 조정에 일본이 침략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치에 따라 대신들은 유능한 무인 관료들을 천거했는데 ‘선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은 우의정이었던 이산해가 추천한 7명 중 세 번째 순위로 그리고 병조판서였던 정언신이 추천한 9명 중 역시 세 번째 순위로 복수 천거됐다. 

이와 같은 대신들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격 발탁해 전라 좌수사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산해나 정언신 같은 대신들은 왜 이순신을 천거했을까. 이순신이 32세 때 무과에 합격해 처음으로 받은 직책이 종9품에 해당하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었는데 36세 때에는 종4품인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가 된다. 만 4년이 안 돼 품계상 10단계를 승진했으니 초고속 승진한 셈이다. 무인 관료로서의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숱한 일화를 남긴다. 의리에 맞지 않으면 비록 직속상관이라도 그 뜻을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결국 발포 만호시절 처음으로 파직되면서 시련의 관료 생활이 시작되는데 파직된 이유가 훈련원 봉사 시절 부당한 인사에 반발하면서 갈등을 빚었던 직속상관 서익이란 사람이 감찰관으로 내려와 불리한 보고를 조정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비록 어려운 관료 생활을 영위해 갔지만, 무인 관료로서의 실력은 착실히 닦아가고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에 북쪽의 오랑캐와 세 번의 전투를 치른다. 1583년 니탕개난, 1587년 녹둔도 전투, 1588년 시전부락 전투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 세 번의 전투에 모두 참여해 일정한 정도의 전공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도 이순신은 작전 절차나 결과를 놓고 직속상관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데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처벌할 것인지 아니면 포상할 것인지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어쨌든 이순신은 당시 조선에서 실전 경험을 지닌 얼마 안 되는 뛰어난 무인 관료군에 포함돼 그 이름이 조정 안팎을 오르내렸다. 아마도 이순신의 이와 같은 이력과 경력이 ‘불차탁용’ 제도가 시행될 때 이산해나 정언신 같은 대신들이 그를 천거하게 된 배경이었을 것이다.

전라 좌수사로 부임할 때 이순신의 나이는 47세였다. 전라좌수영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이미 10여 년 전인 36세 때 전라좌수영 관할 부대인 발포에서 대령급 지휘관인 수군 만호로 2년 가까이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라좌수영은 이순신이 수사로 부임하기 4년 전인 1587년 왜구와 대규모 해전을 치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참모 중엔 실전 경험을 지닌 장수들이 많이 있었다. 이순신이 주력함선인 판옥선이 있었음에도 돌격선 용도로 거북선을 창제하게 된 것은 이런 개인적 이력과 전라좌수영의 역사가 그 배경이 됐을 것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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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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