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qpkFw7

<23>이순신의 리더십 (5):사랑(仁)의 힘을 키워라
극진한 효심에 누적된 사랑의 힘 충무공의 희생·헌신 에너지 근원
2012. 06. 18   00:00 입력 | 2013. 01. 05   08:05 수정
 
거듭되는 해전에도 불구하고 홀로 되신 어머니 향한 효성 난중일기 곳곳 엿볼 수 있어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어머니가 당부한 가르침 속 ‘효와 충’ 조화 상징적 보여줘

불패의 신화를 이끌었던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했던 진남관.


여수 자산공원의 이순신 동상
 

이순신의 어머니가 기거했던 여수 고음 내 자당 기거지 표지석.

유학(儒學)에서 어버이에 대한 사랑인 효(孝)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인 제(悌)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가장 중요한 사랑[仁] 역량 강화 훈련법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의 힘이 누적돼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유학의 사랑 철학의 핵심 논리이다. 

이순신의 부모에 대한 효심은 남달랐다. 함경도 건원보의 권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이순신은 아버지 이정(李貞)의 상을 당했다. 그는 부고를 듣자마자 모든 것을 젖혀두고 아산으로 향했다. 당시 북방을 순시하던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이 몸이 상할 것을 염려해 상주 복장을 갖춰 입고 천천히 가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순신의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지극했다. 그가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후 임진년(1592년) 1월 1일부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정유년(1597년) 4월까지 쓴 일기에는 해전이 있거나 군사 일로 바쁜 날을 제외하고 어김없이 이순신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난중일기’가 시작되는 임진년(1592년) 1월 1일 설날의 일기도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새벽에 아우 여필,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었다.” 이순신은 주기적으로 어머니가 있는 아산에 사람을 보내 안부를 확인했다. “아산에 어머니 문안차 나장 2명을 내어 보냈다(임진년, 2월 14일).” “아산으로 문안 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 다행이다(임진년 3월 4일).”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2월 14일에 가서 3월 4일 어머니가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갖고 돌아왔으니 한 번 갔다 오는데 대략 20일 정도가 소요된 셈이다. 

이순신 어머니의 생일은 음력 5월 4일이다. 임진왜란 발발 후 이순신이 최초로 전라좌수영 함대를 출동시킨 날이 다름 아닌 임진년 5월 4일, 어머니의 생일날이었다. 동이 트는 시점에 출동해 남해의 미조항에 도착해 평산포, 곡포, 상주포 등의 남해 일원을 수색하면서 어머니 생일날을 보낸 것이다. 그 다음해인 계사년(1593년) 5월 4일에도 이순신은 어머니와 함께하지 못한다. 그날 일기에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라고 적었다.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지 2년 4개월이 되는 계사년(1593년) 6월, 그는 아산에 있던 어머니를 여수 본영 근처인 고음내로 모셔온다. 그러나 여수 고음내에서 한산도 통제영 전진기지까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꽤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머니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이때에도 이순신은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내거나 탐후선 편으로 어머니의 안부를 여쭈었다. 

이순신은 병신년(1596년) 1월 1일 새벽 2시에 고음내에 도착해 어머니와 함께 설을 쇨 수가 있었다. 어머니를 고음내에 모신 지 거의 2년 반 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이순신은 병신년 9월 27일부터 10월 10일까지 약 2주 동안 여수 전라좌수영에 머무르면서 공무를 처결하고 또한 어머니도 찾아 뵈면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를 여수 본영으로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그동안 전쟁 중이라 한 번도 생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송구스러움 때문이었으리라. “새벽에 어머님을 모시고 일행을 데리고 배에 올라 본영으로 돌아와서 종일토록 즐거이 모시니 다행, 다행이다.”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이날은 잔치를 차리지 못하고 이튿날로 미뤘다.” “맑고 따스했다. 일찍이 어머님을 위한 수연을 베풀고 종일토록 즐기니 다행, 다행이다.” “종일토록 어머님을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머니가 퍽 서운해하시는 기색이었다.” “정오에 어머님을 하직하고 오후 2시경 배를 탔다. 바람을 따라 돛을 달고서 밤새도록 노를 재촉해 왔다.” 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이후 이순신은 어머니를 직접 뵙지 못했다. 아마도 이때의 만남이 이순신과 어머니의 마지막 해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순신은 그다음 해인 정유년(1597년) 2월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3월 4일 하옥됐다가 28일 만인 정유년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옥문을 나올 수 있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러 가는 도중, 고향인 아산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접한다. 아들이 파직되고, 의금부에 하옥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의 어머니는 여수에서 배를 타고 아산으로 오다 선상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팔십이 넘은 노친이 아들을 찾아 천리 뱃길을 오다가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누가 봐도 이순신 탓이었다. 일기를 확인해 본다.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둥그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정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죄인의 몸이어서 장례조차 치를 수 없는 처지의 이순신, 그의 고통과 좌절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상상해 본다.

평소 이순신으로부터 지극한 섬김을 받았던 이순신의 어머니가 아들과 헤어지면서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라고 당부한 가르침은 전통사회에서 가족윤리의 핵심인 효(孝)와 국가 공동체 윤리의 핵심인 충(忠)이 어떻게 조화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효(孝)를 통해 누적된 사랑의 힘, 이순신이 나라와 백성과 임금을 위해 헌신, 희생할 수 있었던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왜 그토록 효(孝)를 강조했는지, 과연 오늘날 우리는 사랑 역량 강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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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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