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iEJ1KH
<24>이순신의 리더십(6): 가까운 데서부터 먼 곳으로 사랑[仁]을 실천하라
孝로부터 축적된 사랑의 힘으로부하와 백성에 ‘仁者無敵’ 실천
2012. 06. 25 00:00 입력 | 2013. 01. 05 08:06 수정
아내 위중 소식에 뜬눈 지새 난민 한데 모아 생업 도와
아내 위중 소식에 뜬눈 지새 난민 한데 모아 생업 도와
현충사 내 이순신 고택.
충남 아산 신정호 이순신 동상.
이순신 고택에서 공연한 어린이 체험극 소년 이순신 무장을 꿈꾸다’ 장면.
이순신과 그의 부인 상주 방씨(方氏) 사이에는 아들이 셋 그리고 딸이 하나 있었다. 그 가운데 면은 셋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느 부모처럼 이순신의 막내아들 면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다음은 갑오년(1594년) 고음내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면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적은 일기다. “아침에 들으니 면의 병세가 다시 악화됐고 토혈하는 증세까지 있다 하여 울(蔚)과 심약(審藥) 신경황, 정사립, 배응록 등을 함께 보냈다.” “저녁에 탐선이 들어와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는 것은 살폈으나 면의 병세는 여전히 중하다는 것이었다. 애타는 마음이건만 어찌하랴?” 당시 이순신은 한산도에 머물러 있었고, 여수 고음내에는 어머니가 집을 얻어 기거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아들 면이 병이 났다는 소식에 노심초사하는 광경이다. 그 다음날에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진중(陣中)에 있는 몸이라 여수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나 답답했던지 이순신은 점을 쳤다. “홀로 앉아 면의 병세가 어떤가를 생각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군왕을 만나보는 것 같다>라는 괘가 나왔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는 것과 같다>라는 괘가 나왔으니 둘 다 좋은 것이었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이순신의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7월 15일에는 아들 면의 병세가 호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기에 “면의 병세가 나아간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처럼 애지중지하던 막내아들 면이 정유년(1597년) 아산의 집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지 약 한 달 뒤인 정유년 10월 14일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듣는다. 그날 일기에 자식을 잃은 아비의 애절한 심정을 자세히 기록해다. 인간 이순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육필원고다. “면의 전사 소식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하늘과 땅이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너를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殃禍)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나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하지만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어느 부모인들 자식을 잃고 비통해하지 않겠는가만 아들 면에 대한 이순신의 일기는 한편의 ‘사자곡(思子曲)’이다. 그러나 부하 장병들이 보고 있는 터라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부하 장수들이 위로차 왔지만 비통한 모습의 얼굴을 차마 보여 줄 수도 없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굽는 사람인 강막지(姜莫只)의 집으로 갔다.”(10월 16일) “새벽에 흰 띠를 띠고 향을 피우고 통곡하였다.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10월 17일) 부하들의 시선을 피해 다른 사람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이순신, 죽은 아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이때가 되어서야 마음껏 통곡한 것이다.
이순신의 아내 사랑은 어떠했을까. 이순신의 아내 방씨(方氏)에 대한 일기 기록은 꼭 한 차례 등장한다. 갑오년(1594년) 8월 말, 이순신은 아내 방씨가 아주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접한다. “이날 아침, 탐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고 하니 벌써 생사 간에 결말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마는 세 아들,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아프고 괴롭구나.” 아내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것을 직감한 이순신은 온종일 안절부절못했으며, 밤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앉았다 누웠다 잠을 못 이루고 촛불을 켠 채 뒤척이며 지새웠다. 이른 아침 세수하고 고요히 앉아 병세에 대해 점을 쳤더니, <중이 환속하는 것 같다>라는 괘를 얻었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나아질 것인지 쳐보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 같다>라는 괘였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받을 징조였다.”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이순신이지만 아내의 위중한 병세 앞에서는 그도 평범한 지아비였던 것이다. 이순신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아내 방씨의 병은 점차 나아졌다.
어버이, 자식, 부인에 대한 사랑으로 축적된 이순신의 사랑의 에너지는 점차 부하 사랑, 백성 사랑으로 그 외연이 확대됐다. “삼도 군사들에게 술 1080동이를 먹였다.” “오늘은 권준 수사의 생일이라 하므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에 취하고, 거문고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늦게 대청에 나가서 서류를 처결한 다음 항복한 왜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이순신의 백성 사랑은 구체적이었다. 전쟁 중이라 가장 시급한 일이 먹는 문제였음을 간파한 이순신은 백성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둔전을 개발했다. “신(臣)의 생각에는 각 도에 떠도는 피난민이 한군데 모여 살 곳도 없고, 먹고 살 생업도 없어 보기에 측은하오니 이 섬으로 불러들여 살게 하고, 그들이 협력하여 경작하게 하여 절반씩 갖게 한다면 공사(公私) 간에 양쪽으로 편리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순신이 근무했던 전라 좌수사 시절의 여수 돌산도, 초대 통제사 시절의 한산도, 3대 통제사 시절의 고금도는 백성으로 넘쳐났다. 이순신 가까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어느덧 이순신은 조선 백성에게 한 줄기 빛이요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순신, 그는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자는 대적할 자가 없다)”의 충실한 실천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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