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0JdbX
<21>이순신의 리더십 (3):승리할 수 있는 전문성[知識]을 갖춰라
그는 준비된 무장(武將)이었다
2012. 06. 04 00:00 입력 | 2013. 01. 05 08:02 수정
‘무과 시험’ 위해 10여 년 준비 세 번에 걸친 오랑캐와의 실전 任亂 40여회 해전 모두 승리로
부산 오륙도 전경
부산 용두산 공원의 이충무공 동상.
‘손자’를 비롯한 동양의 많은 병법서에서 리더의 덕목으로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지식이다. 조직 공동체를 잘 리드해 주어진 임무나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관한 지식에 정통해야 한다.
이순신은 준비된 무장(武將)이었다. 그는 22세부터 문과(文科)에서 무과(武科)로 전향해 시험을 준비했다. 경전만을 읽다가 말타기, 활쏘기 등의 신체적 기능을 필요로 하는 시험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6년간의 준비 끝에 28세 때 처음으로 친 무과 시험에서 이순신은 뜻하지 않게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절치부심 다시 4년의 준비를 더 해 32세 때 치른 무과 시험에 합격해 무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됐다.
10여 년의 인고의 세월이 있었기에 이순신은 초급 무인 관료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많은 경우 초급관료 시절 이순신이 미관말직을 전전하다 어느 날 갑자기 류성룡의 천거에 의해 정읍현감(종6품)에서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순신은 초급관료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1576년 무과에 합격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 9품)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만 4년이 못된 1580년 전라도 발포의 수군만호(종4품)가 됐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4년이 안 되어서 무려 10계급이 승진한 것이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시점은 북쪽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였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이후에 조선은 오랑캐와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 1583년 니탕개난, 1587년 녹둔도 전투, 오랑캐의 녹둔도 침범에 대한 보복적 차원에서 시행된 1588년의 시전부락 전투가 그것이다. 이순신은 이 세 번의 오랑캐와의 전투에 모두 참여했다. 니탕개난 때는 니탕개와 더불어 난을 주도한 울지내(鬱只乃)를 유인해 체포하는 공을 세웠다. 녹둔도 전투에서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받았다. 이순신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으며 추격군을 편성해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을 일부 구해왔지만 직속상관인 북병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고, 백의종군의 처분을 받았다. 그 이듬해 벌어진 시전부락 전투에서는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우화열장(右火烈將)의 직책으로 참전,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을 포상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처벌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분분한 논의가 조정에서 있었다. 어느덧 조정 안팎에서 이순신은 꽤 유명한 장수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력이 토대가 되어 선조가 1588년에 시행한 ‘불차탁용(不次擢用, 순서에 관계없이 유능한 무인관료를 발탁하는 제도)’ 제도에 의해 이순신은 이산해·정언신 등에 의해 천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충무공전서’에도 무인 관료 이순신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자료가 소개돼 있다. 1580년 발포 만호로 근무했을 때 감사 손식(孫軾)이 누군가 참소하는 말을 듣고 이순신을 벌주기 위해 불시에 발포 만호진을 방문했다. 손식은 일부러 부대 외곽에 도착해 이순신을 불러냈다. 그러고는 즉석에서 진법에 관한 책을 강독하게 하고 또 여러 가지 진형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시켰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작정을 한 처사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붓을 들고 진형도를 아주 정교하게 그려냈다. 감사 손식이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다가 “어쩌면 이리도 정묘하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라며 감탄하고는 이순신의 조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진작 그대를 몰라봤던 것이 한이구려” 하면서, 그 뒤로는 이순신을 정중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이용이라는 수사 역시 이순신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을 미워해 벌을 주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수사와 감사가 함께 모여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심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이용은 이순신을 최하로 평가하려고 했다. 이때 중봉 조헌(趙憲)이 도사(都事)로서 붓을 들고 있다가 쓰지 않고 말하기를, “이순신이 군사를 지휘하는 능력이 전라도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들어 왔는데 다른 여러 진을 모두 아래에 둘망정 이순신을 아래에 둘 수는 없을 것이오”하고 제지했다. 이순신은 이미 관료들 사이에서도 무장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실력에 기초해 이순신은 임진왜란 7년 전쟁 기간 40여 차례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위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했으며, 명량해전과 같은 절대 열세의 해전에서는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함으로써 수적 열세를 극복했다. 또한, 한산도에서 남해의 바닷길을 막아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동쪽으로는 함경도, 서쪽으로는 평양까지 진격했던 일본의 선봉 주력부대를 남해연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마지막 무술년(1598년)에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합세해 조·명 수군 연합함대가 구성됐다. 진린은 거만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진린도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식견과 지휘역량에 경탄해 모든 일을 이순신과 상의해 처결했다. 진린은 매번 이순신을 볼 때마다 “공(公)은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오. 만일 중국에 들어가 벼슬을 한다면 당연히 천하의 명장이 될 것인데 왜 여기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내는 것이오”라고 하고 또 조선의 임금인 선조에게도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다시 세운 공로를 가진 분이오”라는 글을 올릴 정도로 이순신의 능력과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우리가 이순신을 유능한 리더로 추앙하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그가 일궈낸 전승무패의 승리 신화 창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창출은 10여 년에 걸친 착실한 무과 시험 준비, 세 번에 걸친 오랑캐와의 실전 경험 등이 토대가 됐다. 전문성으로 대변되는 실력과 능력, 리더가 갖춰야 할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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