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jwziWX
<22>이순신의 리더십 (4): 약속과 신의를 지켜라
함께 사선을 넘나들던 부하들 끝까지 배려
2012. 06. 11 00:00 입력 | 2013. 01. 05 08:03 수정
힘써 싸운 자 전공 높이 평가 정운 장군 이대원 사당에 배향 포상 원칙 공개하고 약속 지켜
통영 남망산 이충무공 동상.
군대에서 신의[信]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형벌과 포상에 대한 공정성이다. 특히 생명이 오가는 전시의 경우 리더와 구성원 사이의 상벌에 관한 신뢰 여부는 전투력 발휘에 직결되는 요소다. 그래서 손자는 장수의 자질을 논할 때 신의[信]를 “병사들이 형벌과 포상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더가 포상을 남발하는 것은 그만큼 조직을 지휘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처벌 또한 마찬가지다. 후진 독재국가는 관료나 군의 간부들이 가슴 가득 훈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국민에게 동기 부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종종 뉴스에서 등장하는 북한이나 중국의 공개처형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인 처벌인 공개처형을 해서라도 주민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니 이 또한 주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어려운 상황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상이든 처벌이든 그것이 지닌 본래의 효과를 달성하려면 리더와 구성원 사이에 일정한 믿음[信]이 전제돼야 한다.
이순신은 임진년(1592년) 첫 출동을 치르면서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한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한쪽에서는 죽은 일본군의 머리를 베는 일이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 종료 후 전공에 따른 포상을 건의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했는데 그 증거가 바로 전사한 일본군의 수급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제2차 출동을 앞두고는 부하 장병을 모아놓고 적의 수급을 베는 일에 몰두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일본군의 목을 벤 수효가 아니라 힘써 싸운 자의 전공을 가장 높이 평가해 포상할 것임을 엄중히 약속했다. 장계를 확인해 본다. “왜선을 분별한 총 수는 72척이며 일본군의 머리가 88급인데 왼쪽 귀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 궤 속에 넣어 올려보냅니다. 그런데 신(臣)이 당초 약속할 때 여러 장수나 군사들에게 <공로와 이익을 탐내어 서로 다투어 적의 머리를 베려 하다가는 도리어 해를 입어 사상자가 많아지는 정례가 있으므로 사살한 뒤에 비록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힘써 싸운 자를 제일의 공로자로 논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무릇 네 번이나 접전할 때,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이 매우 많았지만, 머리를 벤 것은 많지 아니합니다.” 이순신은 부하들과의 약속에 따라 해전이 끝난 후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한 전과를 토대로 전공을 1, 2, 3등급으로 나누고 비록 목을 베지 못했어도 죽음을 무릅쓰고 열심히 싸운 자를 제1의 공로자로 정해 포상을 건의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명령대로 목을 베는 데 힘쓰지 않고 격파하고 사살하는 데만 힘쓴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을 1등의 공로자로 정해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머리를 벤 증거가 없으니 전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던 것 같다. 그러자 이순신은 다시 장계를 올려 방답 첨사 이순신의 포상을 강력히 건의했다. “방답 첨사 이순신은 변방 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 네 번 적을 무찌를 적에 반드시 앞장 서서 공격했으며, 당항포 해전 때에는 왜장을 쏘아 목을 베어 그 공로가 월등할 뿐만 아니라, 다만 사살하는 데만 전력하고 목 베는 일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들어 별도로 장계했는데, 이번 포상의 문서에 홀로 이순신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으니 군사들이 해괴하게 여깁니다.” 이순신은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사살하는 데만 힘쓰고 목을 베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은 방답 첨사 이순신의 포상을 끝까지 관철시켜 자신이 부하 장병들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마음, 한뜻이 되어 수없이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부하 장수들은 끝까지 신뢰하고 배려했다. 낙안 군수 신호의 군관인 송여종(宋汝悰)이 임진년 4차례의 출동에 모두 참여해 탁월한 전공을 세우자 이순신은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한 내용의 장계를 임금이 있는 의주의 행재소에 전달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장계를 확인해 본다. “태인현에 사는 업무교생 송여종은 낙안 군수 신호의 대변군관으로 네 번이나 적을 무찌를 때, 언제나 충성심을 발휘하여 남들보다 앞서서 돌진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워서 왜의 머리를 베었으며, 전·후의 전공이 모두 1등에 해당하는 자이므로 이 계본을 모시고 가게 했습니다.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송여종은 이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으며, 임금에게 술까지 하사받고 정운(鄭運)의 전사로 공석이 된 녹도 만호에 임명되는 영광을 안았다. 해전의 승첩 내용이 기록된 장계를 가져가면 패전 소식만 듣던 임금이 기뻐할 것이고 그것을 갖고 수천 리를 달려온 송여종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포상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일부러 송여종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부산포 해전에서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정운을 이대원(李大源) 사당에 배향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신(臣)이 믿는 사람은 정운 등 2, 3명이었는데, 세 번 승첩 때에는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 부산 해전에서도 몸을 가벼이 여겨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해,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오히려 힘껏 쏘기를 빨리 하여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였는바, 이는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녹도 만호 정운은 임진년 첫 출동이 있기 하루 전인 1592년 5월 3일 이순신에게 면담을 신청해 속히 출전할 것을 건의한 장수다. 정운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바로 그 다음날인 5월 4일을 출동 날짜로 결정할 만큼 그를 신뢰했다. 포상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철저하게 따라준 부하 장수를 끝까지 챙긴 이순신, 부하의 전공을 낱낱이 기억해 포상을 받도록 배려하는 이순신, 부하 장수가 전사한 뒤에도 그의 전공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이순신, 조선 수군 장병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한 바탕에 그의 따듯한 인간미와 신의[信]라는 덕목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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