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8. 이순신 병법 (5) 정확한 정보가 아니면 함부로 부대를 움직이지 마라
정보획득의 원리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승리를 위한 작전계획은 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수립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미 앞서 살펴 본 전쟁 승리의 원리도 정확한 정보가 아니면 제대로 구사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정보획득의 원리는 다른 모든 병법의 기초인 셈이다. 

▶ 이순신은 정보수집 및 활용의 귀재였다. 

이순신은 정확한 정보 없이는 결코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0일 뒤인 5월 4일에야 제1차 출동에 들어가는데, 이렇게 지체된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왜 수군 함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첫 해전이 있게 된 5월 5일 옥포만 포구에 있는 일본 수군 함대를 제일 먼저 발견한 자는 정보 수집을 위해 앞서 보냈던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었다. 같은 날 합포에 일본 수군 대선 5척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 것도 사전에 파견한 탐망선에서였다.

이순신의 정보 수집에 대한 노력은 임진년(1592년) 첫 출동에서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조선수군은 일본 수군의 함선세력과 활동장소를 훤히 꿰뚫고 있었던 반면에 일본 수군은 상대적으로 남해연안의 지리에 어두웠고, 설상가상으로 초기에는 경계나 정보수집을 위한 탐망선 운용에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파죽지세의 지상전 승리에 도취해 있던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존재를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

임진년(1592년) 제2차 출동 때부터 이순신은 일본 수군 함대 색출을 위한 탐망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드디어 6월 2일 오전, 이순신은 일본 함대가 당포 선창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대선 9척, 중ㆍ소선 12척으로 도합 21척이었다. 이순신은 먼저 거북선을 투입하여 지휘선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함포 공격을 실시하여 21척 모두를 격파, 분멸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지역의 일본 수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또 다시 탐망선을 풀었다. 

“6월 4일 이른 아침에 당포 앞바다로 나아가 진을 치고, 작은 배로 하여금 적선을 탐망하게 하였는데......”(《李忠武公全書》 卷二, 玉浦破倭兵狀)

이순신은 정보수집을 위한 탐망선 운영을 전방위로 넓혀 갔다. 또 그는 탐망선 이외 현지인들에게서도 적에 대한 1급 정보를 입수하곤 했다. 다음은 당포해전 다음에 이루어진 당항포해전 직전에 정보를 입수했던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초5일은 아침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가 늦어서야 걷혔는데, 거제로 도망친 적을 토벌하려고 돛을 올려 바다로 나오는데 거제에 사는 귀화인 김모 등 7, 8명이 조그마한 배에 같이 타고 와서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포에서 쫓긴 왜선이 거제를 지나 고성 땅 당항포로 옮겨 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李忠武公全書》 卷二, 玉浦破倭兵狀)

이순신은 정보를 입수한 즉시 함대를 출동시켜 당항포 어귀에 정박하고 있던 적선 대ㆍ중ㆍ소선 총 26척을 공격하여 모조리 격파하였다. 6월 7일 율포에서 일본 함선 7척을 추가로 격파한 이순신은 6월 8일 조선수군 주력함대를 마산 앞 남포 앞 바다에 진을 치도록 하고,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까지 탐망선을 파견하여 일본 수군의 흔적을 탐색하였다. 

제3차 출동 중에 있었던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는 한산해전이 있기 하루 전 미륵도(彌勒島)의 당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현지인인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일본 함대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견내량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 지휘부는 조선 수군이 코 앞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반해 이순신은 밤새도록 어떻게 하면 일본 수군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작전계획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탐망선의 적극적인 운영은 두 가지 면에서 유익하였다. 하나는 전투에 앞서 적의 세력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사전에 승리할 수 있는 작전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함대의 불필요한 기동을 최소화함으로써 노를 젓는 격군(格軍)들의 피로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모든 전략전술과 작전계획은 언제나 사전에 획득한 정확한 정보 분석을 토대로 수립되었다. 계사년(1593년)의 장계는 이순신의 정보수집체계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이 거느린 함선은 전선이 42척이고 정탐용 작은 배가 52척이며, 우수사 이억기가 거느린 함선은 전선이 54적이고 정탐용 작은 배가 54척이며, 전쟁기구는 배의 척수에 따라 정비하였습니다.”(《李忠武公全書》 卷三, 請湖西舟師繼援狀)

이 기록을 토대로 계사년(1593년) 기준 전라좌우수영의 함선세력을 정리해 보면 함선 세력 가운데 전투함이 96척이요, 탐망선이 106척이다. 특히 일본군과의 접적지역에 있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는 탐망선이 전투함보다 10척이나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계사년(1593년)부터 정유년(1597년)까지 한산도에 통제영을 둔 이순신은 일본군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탐망선 이외에 별도로 육상의 정찰부대를 운용하였다. 거제도의 안쪽 바다로 통하는 칠천량 앞 바다를 감시하는 영등(永登) 정찰부대와 거제도의 바깥 바다로 통하는 해로와 웅천 및 가덕도 앞 바다를 감시하는 대금산(大金山) 정찰부대 그리고 고성 쪽의 육지와 바다를 감시하는 벽방산(碧芳山) 정찰부대가 그것이다. 이 부대의 활약을 통해 이순신은 안골포, 가덕도, 제포, 웅포, 거제 등을 오가는 일본 수군과 고성 쪽의 일본 지상군의 동태를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육로로 정찰 임무를 띤 군관을 직접 보내 거제 동쪽의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였다.

정확한 정보 없이는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던 이순신은 가등청정을 잡으러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닷길이 험난하고 또한 적이 반드시 여러 곳에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릴 것이니, 배를 많이 거느리고 간다면 적이 알지 못할 리 없고, 배를 적게 거느리고 가다가는 도리어 습격을 당할 것입니다.”(《再造藩邦志》)

한 마디로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기초하여 수군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이순신의 입장이었다. 이는 전투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조정의 정보 획득 및 분석 능력에 대해 신뢰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그 자신이 파직되어 투옥되고 임금을 능멸하였다는 죄로 죽임을 당할지언정 거짓 정보에 기초하여 병사들을 죽을 곳으로 내어 모는 그러한 무모한 작전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 명령에 따른 단 한번의 출동으로 칠천량에서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원균은 자신의 자리를 위해 부하들의 생명을 담보로 했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영예를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조선의 최후의 보루였던 수군을 온전히 보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무기, 군사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