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11. 이순신병법 (8) 한산해전 다시보기 
 
한산해전하면 생각나는 것이 54척 대 73척의 열세의 해전, 학익진 그리고 거북선이다. 그러나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조선 함대의 규모는 대선 59척, 소선 50척으로 총 109척이다. 척수 면에서도 조선 수군은 열세가 아니었다. 이제 영웅은 언제나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워 이겨야한다는 기존의 편견에서 벗어나 앞에서 살펴 본 병법의 관점에서 임진왜란 3대 승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해전의 승리요인을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한산해전은 이순신 병법의 실체를 가장 잘 확인해 볼 수 있는 대표적 해전이다.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신예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로 대변되는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와 병법과 리더십으로 대변되는 소프트웨어적 전투력 요소에서 우위에 있어야 한다. 아래에서는 소프트웨어적 전투력 요소 가운데 하나인 병법의 관점에서 한산해전의 승리요인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적용된 병법은 ‘정보획득(情報獲得)의 원리’이다.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 함대를 통합한 이순신 함대는 한산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임진년(1592년) 7월 6일 미륵도의 당포에 정박하였다. 동풍이 강하게 불어 더 이상 전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 그 섬에 숨어 살고 있던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적선 대ㆍ중ㆍ소선을 모두 합해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경 거제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에 도착하여 현재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를 토대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격파할 작전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다.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조선 수군이 코 밑에서 자신들을 노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일본 수군과 밤새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조선 수군! 이미 해전의 초기 단계부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에게 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적용된 병법은 ‘병력집중(兵力集中)의 원리’이다. 병력집중은 우세한 전투력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병법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제3차 출동에서도 이순신은 가용한 전라좌우수영, 경상우수영의 함선을 모두 동원하여 통합하였던 반면에, 이순신 함대를 격파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은 일본 정예 수군은 통합되지 못했다. 협판안치(脇坂安治,와키사카 야스하루) 지휘하의 일본 수군이 먼저 출발하여 견내량에 도착했을 때, 구귀가륭(九鬼嘉隆,구키 요시타카) 및 가등가명(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 지휘하의 일본 수군은 안골포에 머물러 있었다. 만일 협판안치의 일본 수군이 안골포에 있었던 일본 수군 대ㆍ중ㆍ소선 42척과 통합된 상태에서 해전을 벌였다면 이순신도 그처럼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셋째로 적용된 병법은 ‘주동권확보(主動權確保)의 원리’이다. 주동권 확보의 요체는 아군에게 유리한 장소와 시간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한산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편리하고 나아가 전과(戰果)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좁은 견내량 보다는 넓은 한산도 앞바다가 유리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이미 싸우기 하루 전에 일본 정예 수군과의 해전 장소를 물색하였고 그들을 조선 수군이 싸우기에 유리한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계획된 전술진형이었던 학익진을 펼쳐 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해전 장소의 주도적 선택! 이 또한 한산해전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넷째로 적용된 병법은 ‘화력집중(火力集中)의 원리’이다. 한산해전에서 사용된 저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은 조선 수군의 화력을 적의 핵심 전력이나 지휘선에 집중시키기 위한 진형법이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여 선두에서 따라오는 일본 함선 2, 3척에 화력을 집중하여 순식간에 격파함으로써 개전 초기에 일본 수군의 사기를 꺾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바다 가운데 나와서는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벌여서 일시에 진격하면서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여러 총통을 쏘아서 먼저 2, 3척을 쳐부수자, 여러 배의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도망하므로 여러 장수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뽐내어 앞을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니....”(『李忠武公全書』卷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학익진은 결국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체계인 총통의 화력을 소수의 일본 함선에 집중하여 일시에 격파하기 위한 것으로 구체적인 전투 국면에서의 절대 우세를 선점하기 위한 진형법이었던 것이다. 병력을 통합하여 전체 함대 세력의 우위를 조성한 이순신은 화력집중을 통해 구체적인 전투 국면에서도 우세를 확보함으로써 승리의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다섯째로 적용된 병법은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이다. 앞에서도 이미 한 차례 살펴보았듯이 이순신은 한산해전에 임하면서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전과(戰果)를 극대화 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다음의 장계가 그것을 반증해 준다.

“견내량은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되어 싸움하기에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李忠武公全書』卷二, 狀啓一, 見乃梁破倭兵狀)

해전 결과 일본 함대의 함선 73척 가운데 59척이 격파, 분멸된 반면 조선 수군의 함선은 단 한 척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순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반증해 준다. 이순신은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해전은 결코 벌이지 않았다. 그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승리하는 군대는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놓고 싸운다(勝兵, 先勝而後求戰)”는 이른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를 철저히 준수하였다.

이순신이 구사한 해전전술과 해전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한산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결코 열세가 아니었다. 해전이 있기 하루 전에 일본 수군의 함대 규모를 파악한 이순신은 해전 장소로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를 택했다. 이는 열세의 함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책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이미 해전이 있기 전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총통으로 무장한 조선 수군의 함선 1척이 지니는 전투력이 일본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1, 2차 출동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한산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일본의 조선 침략 전략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해로가 막힘에 따라 수륙병진 전략이 난관에 부딪히고, 한양 북쪽으로 진격하였던 일본의 선봉부대들은 군수지원 및 퇴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은 곡창인 호남이 보전됨으로써 장기전을 치를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계사년(1593년) 이순신은 한산도에 통제영을 건설하였다. 이후 정유재란 직전 통제사에서 파직될 때까지 이순신은 한산도를 중심으로 거제도 내해(內海)와 외해(外海)를 가로 막는 호남 길목 차단 전략을 구사하였다. 일본 수군은 호시탐탐 호남 진출을 노리고 있었지만 한산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위력을 실감한 그들은 감히 견내량을 돌파하여 조선 수군과의 결전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무기, 군사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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