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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15> 제3부 가야인의 삶 ④ 예안리 사람들
[국제신문] /박창희기자
1천6백년전 삶의 편린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는 가야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더듬어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사적 261호 예안리 고분군이다.
부산→김해 14번 국도를 따라가다 김해 선암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서낙동강을 끼고 6㎞ 가량을 들어가면 예안리 고분군을 만난다. 겉으로는 고분인지 잔디밭인지 모를 밋밋한 유적이지만, 입간판을 찬찬히 훑어보면 ‘역사적 전율’이 느껴진다. 1천6백여년전 바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가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안리 고분은 지난 76~80년 부산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져 모두 183기의 분묘유구와 1천4백여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됐다. 이곳에서 확인된 목곽묘, 수혈식 석곽묘, 횡구식 석실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묘제와 토기·철기류는 4~7세기 가야사의 ‘편년’을 규정하는 기준을 제공했다.
특히 여기서 수습된 210기의 인골 가운데 절반 가량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고대인의 형질인류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예안리 고분군 유적조사보고서’(부산대 박물관 1985년 발간)에 따르면, 예안리 인골들은 대개 장대한 기골이 특징이다. 그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64.7㎝, 여성이 150.8㎝로 1930년대 중부 이남 사람들의 평균 키보다 크다.
골격상의 특징은 현대인에 비해 안면이 높고 코가 좁으며 콧부리가 편평하다. 전체 사망자 중에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고, 청·장년층의 사망률이 높다. 이곳의 옹관묘에는 대부분 어린 아이가 매장됐는데, 11세 이하의 어린이 사망자가 확인된 것만 전체 4분의 1에 달했다. 당시의 높은 유아사망률은 의료수준이 낮았던 고대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도표 참고>
다양한 질병에 시달려
예안리 고분은 당시 일반 백성들의 생활고까지 보여준다. 부산대 의대 해부학교실과 일본 성 마리안나 의대팀이 공동으로 벌인 예안리 고 인골 연구결과를 보면, 가야인들은 생전에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다양한 질병을 앓았다.
인골들 중에는 관절이 정상인보다 굵고 척추가 늘어난 경우가 적지 않다. 척추 디스크를 앓은 흔적을 보인 인골도 있다. 이 경우 삐져나온 뼈가 신경을 건드렸을 터이니 당사자는 지독한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뼈가 부러지고도 치료를 못해 뼈 모양이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도 있다. 정상적인 인골에 비해 대퇴골 관절이 훨씬 큰 인골도 있다. 이 경우는 골반에 대퇴골이 완전히 맞물리지 못하면서 고관절 부분이 부어 아마 평생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외상에 의한 염증이 골막염을 일으킨 경우도 보이고, 증세가 더 심해 염증이 뼈까지 침투해 들어간 인골도 있다. 이런 질병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요즘도 나타난다.
예안리 인골들 중에는 날카로운 이기(利器)에 의한 손상흔, 즉 전쟁 등으로 인한 상처나 사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4~7세기 김해 예안리는 아마도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 같다.
예안리 인골들은 그들이 생전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는지까지 알려준다. 당시 사람들의 상당수는 충치를 앓았다. KBS 역사스페셜팀은 2년전 예안리 인골들의 치아를 엑스레이로 촬영해 이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의 치아는 대개 상아질이 완전히 닳아 있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치간의 3분의2 정도가 없어진 경우도 있다. 치아를 많이 사용했다는 뜻이다.
생전에 이가 모두 빠져 잇몸으로 살았을 사람도 있고, 축농증에 시달린 이도 있다. 고름주머니가 생겨 입속에서 골수염이 진행된 경우도 나타난다.
학자들은 예안리 인골의 치아에 옥니가 많은 것을 들어 당시 가야인들이 아래턱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치아 대부분에 균열이 나 있는 것은 모래가 섞인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많이 섭취한 증거라고 말한다.
고대 국제교류까지 설명
예안리 고분의 인골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조개껍데기가 많은 땅에 묻혀 뼈가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안리는 원래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모래땅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생활쓰레기장인 패총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의 알칼리 성분은 산성 토양을 중화시켜 인골의 부식을 막는다. 조개껍데기가 많이 섞인 토양은 비가 오면 패각의 칼슘 성분이 녹아 모래땅으로 스며들고 땅 속의 인골에까지 탄산칼슘이 충분히 공급되어 최상의 보존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가야인의 원류를 더듬어볼 수 있는 인골은 예안리 외에도 경남 사천시 늑도의 30여기 유구에서도 확인됐다. 학자들은 일본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기원전후의 ‘야요이 인골’이 예안리 가야인과 같은 형질이라는 사실을 중시, 야요이 토기를 만든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파악한다. 가야인과 고대 일본인은 2천여년 전부터 교류를 가진 것은 물론 형질인류학적인 공통점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안리 고분은 가야인들의 삶과 죽음을 전해주는 한편 고대사회의 국제교류까지 설명해주는 타임머신으로 비어 있던 가야사의 중요한 장면을 채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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