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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다이빙 벨'..위험하고 촌스러운 논란
SBS | 윤창현 기자 | 입력 2014.10.08 17:42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선 마이클 무어

혹시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 십년 전 쯤 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이클 무어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섰습니다. 당시 미국의 한 학교에서 벌어졌던 총기 난사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총기문화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미국의 총기산업과 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논쟁적 다큐멘터리 '볼링 포 컬럼바인'을 만들었고, 이게 영화의 메카인 아카데미상에서 당당히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던 겁니다.

"미스터 부시, 부끄러운 줄 아세요!"

당시 시상식은 미국이 2차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열렸습니다. 시상대에 오른 무어는 수상소감을 통해 부시 당시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선거를 통해 뽑힌 거짓된 리더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거짓된 이유로 전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미스터 부시! 우리는 이 전쟁에 반대합니다. 당신의 시간은 끝났어요!"

그의 발언에 시상식장은 술렁였습니다. 일각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고, 오랜 공화당 지지자인 해리슨 포드가 쓴 웃음을 짓던 장면이 화면에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무어의 발언에 대해 호불호와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그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컬럼바인'에 대해서도 공화당 지지자들과 미국 내 보수층은 불편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무어는 화씨 911, 식코 등 국내에도 잘 알려진 논쟁적 이슈의 다큐멘터리를 잇따라 선보였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적 권리"

하지만 작품에 대한 비난과 불편함이 있을지언정 이를 상영하라 말라는 논란은 아예 없었습니다. 창작자의 권리, 표현의 자유는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헌법 정신이고 여기에 대해선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미국의 수정헌법 1조> 의회는 언론, 출판의 자유 또는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수 있는 권리와 고충 처리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너무도 촌스러운 '다이빙 벨' 논란


이런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이번 부산영화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이빙벨' 논란은 그 자체로 몹시 촌스러워 보입니다. 부산영화제 주최 측은 지난 9월 2일 상영작 313편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대부분의 기자는 '다이빙 벨'상영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주옥같은 거장들의 작품과 좀처럼 보기 힘든 아시아 각국의 명작들 속에 묻혀 이 문제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지 조차 알기 쉽지 않았습니다.

'반정부 세력의 노이즈 마케팅(?)'...적반하장

하지만 부산 영화제 예산의 40% 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부산시가 나서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서병수 시장이 공개적으로 '다이빙 벨'에 대한 상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죠. 여기에 세월호 일반인 유족들까지 나서서 공정성에 문제를 삼았습니다. 어제는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 현장에서 새누리당 국회의원 여러 명이 '다이빙 벨' 상영을 철회하지 않으면 해마다 14억원쯤 되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국고지원을 끊으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했습니다. 일부 의원은 실정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어떤 의원은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를 떠나 돈줄을 끊으라고 엄포를 놨습니다. 또 다른 의원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세력이 노이즈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시민은 인식 조차 하지 못했던 작품의 존재를 일깨우고 비록 두 차례에 불과한 상영이지만 매진 행렬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은 이 작품에 반대하는 분들의 노이즈 마케팅 때문이라는 게 영화계의 중론입니다.

'마음에 안 드니 돈줄을 끊어라(?)'...19년 공든 탑을 위협하는 천박한 발상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틀면 돈줄을 끊겠다는 이 천박한 발상은 과거 줄자로 스커트 길이 재고 장발이라고 머리에 고속도로를 만들던 엄혹했던 어느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이빙 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의 생각도 충분히 존중돼야 하지만, 그러니까 '다이빙 벨'을 틀지 말라는 것은 분명 위헌적이고 독재적인 발상입니다.

'다이빙 벨'이 좋은 다큐멘터리인지, 공정한 지 아닌 지에 대해선 얼마든지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란일 뿐이지 이 다큐가 옳고 그른 지에 대한 절대기준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창작의 기본적인 출발점이자 민주주의 사회의 운영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제는 같은 사물과 현상을 보는 수많은 다른 시선이 교차하는 공론의 장입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잊고 있던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혹은 비판적 고찰을 하기도 합니다. 이번 논란처럼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리다고 주장하며 상영중단 압력을 넣기 시작하면 지난 19년 동안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성장해 온 부산영화제는 창작자들이 숨 쉴 수 없는 죽은 공간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다양성과 공존이 거부되는 영화제에 어떤 창작자들이 작품을 내놓으려 하겠습니까?

'다이빙 벨' 때려잡으면 문화가 융성되나(?)

정부는 '문화 융성'을 핵심적인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영화 등 콘텐츠 산업의 육성을 위해 온갖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문화융성위원장 자리에 앉아계신 분이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만든 김동호 부산영화제 명예 집행위원장입니다. 지금 벌어지는 '다이빙 벨' 논란과 부산영화제에 대한 국고지원 중단 움직임은 결코 정부가 말하는 '문화융성'과 양립해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번 '다이빙 벨' 상영을 둘러싼 논란은 최근 한국사회가 얼마나 퇴행적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지를 확인시켜준 부끄러운 예가 될 것입니다. 집권당 국회의원들의 엄포처럼 이번 일을 핑계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국고지원을 중단한다면 정부 스스로가 '문화융성'이라는 국정과제가 허울뿐인 구호임을 입증하는 자해행위가 될 것입니다.
 
윤창현 기자chyu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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