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hn_019_0070&fileName=hn_019_0070.pdf
*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Ⅳ.지방도시성 - 1.府 城 - 1) 西古城"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서고성(西古城)

이 성은 서고성자성(西古城子城)이라고도 불리며 1982년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는데, 화룡현성에서 동북쪽으로 25km 떨어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성향 북고성촌(西城鄕 北古城村)에 자리잡고 있다. 성의 남쪽에는 헤이룽강(海蘭江)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도구(頭道(溝))평야의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두도평야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유역의 평야 중에서 가장 크다. 이 평야는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동서 길이 약 30km, 남북 너비 약 10km이고, 그 주위에는 구릉들이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토질이나 기후, 교통 및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람이 거주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발해시기에도 아주 중시되던 곳이다. 

이곳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인들이 발행한 《統監府間島臨時派出所紀要》 (1909), 《間島事情》(1918) 등에서 소개되기 시작하였고,58)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은 1923년, 1924년 이곳을 방문하여 관심을 가져오다가 1937년, 1943년, 1945년 서고성을 발굴하기도 하였다.59) 그 외에 1935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이 이곳을 방문하였고,60) 1942년 사이토 진베이(齋藤甚兵衛)가 조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61) 2차대전 이후 연변박물관등에서 여러 차례 이곳을 지표조사하였으나 자세한 조사 경과는 알 수 없고,62) 북한에서도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63)

(그림 8) 서고성

성은 토성으로서 외성, 내성으로 이루어졌다(그림 8).64) 성의 방향은 정북에서 서쪽으로 10° 치우쳐 있다. 외성은 장방형이고 둘레가 약 2,713m로서 서벽 728m, 동벽 729m, 남벽 626m, 북벽 630m 이다. 성벽은 흙을 판축하여 쌓았는데 판축 두께는 10cm 정도이다. 성벽의 바닥 너비는 13∼17m, 위의 너비는 1.5∼4m 이고 잔존높이는 1.8∼2.5m이며 4.5m 높이에 달하는 곳도 있다. 성벽은 파괴가 심하여 동, 서 양벽과 남벽 서단의 정상부는 차도가 되어버렸고 나머지 성벽의 정상부도 길이 되어 있다. 성벽 밖에는 해자를 돌렸던 흔적이 보인다. 또 남, 북벽의 가운데에는 잘린 부분이 성의 남북 중심선상에 있는데 이곳이 남, 북문지에 해당한다. 너비는 15m 이다.

내성은 외성 가운데에서 북쪽으로 다소 치우친 지점에 위치한다. 장방형으로 남북 길이 310m, 동서 너비 190m 이다. 내성 북벽은 외성 북벽으로부터 70m 떨어져 있다. 내성 성벽도 파괴가 심하다. 내성 중, 북부에서 모두 5개의 건축지가 확인되었다. 한편 내성과 외성 사이 특히 내성의 북벽과 외성의 북벽 사이에서 또 하나의 벽이 발견되었는데 주영헌은 이것을 중성의 벽이라고 칭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또 사이토진베이(齋藤甚兵衛)는 팔련성의 경우에서처럼 서고성 밖에 또 하나의 성벽이 둘러쳐져 있어 이것이 외성이고 서고성의 성벽은 내성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65)

이 성을 조사하면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역시 건축 자재인 기와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동경성, 하남둔(河南屯)고성, 팔련성의 경우와 같이 문자와(文字瓦)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발해의 중경현덕부 소재지에 대해서도 학설이 분분하여 구국과 중경이 동일한 지역인지 여부, 중경의 소재지가 중경현덕부 아래의 노주(盧州)인지 현주(顯州)인지 여부 등이 엇갈려왔다.6) 서고성이 발해 중경현덕부의 소재지라는 주장은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등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곳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거의 정설화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에 인용된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를 바탕으로 이곳에 일시적으로 도읍을 정하였었다는 견해가 일부 피력되고 있고,67) 또 중경의 소재지로는 인정하지만 이곳이 과연 중경 아래 어느 주(州)의 소재지인지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의 평면 구조가 도성이었던 동경성이나 팔련성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림 9) 해란강 유역 발해 유적 분포도

서고성이 자리잡고 있는 화룡현 지역에도 발해시기 유적들이 많다(그림9).68) 우선 성으로서는 하남둔고성(河南屯古城), 해란고성(海蘭古城), 홍성고성(紅星古城), 용천고성(龍泉古城), 장항고성(獐項古城), 장인유지(長仁遺址), 용해고성(龍海古城), 팔가자남산산성(八家子南山山城) 등이 있다. 고분으로는 정효공주묘가 소재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한 용두산(龍頭山)고분군, 순금제 장식들이 발견된 하남둔(河南屯)고분을 비롯하여 북대(北大)고분군, 용해(龍海)고분군이 있고, 홍성(紅星), 서고성북남구(西古城 北, 南溝), 장인(長仁), 청룡(靑龍), 명암(明岩), 흥성(興城), 장항(獐項) 등지에서도 고분이 발견되었다.

또 절터로는 하남둔사지(河南屯寺址), 군민교(軍民橋)사지, 하남둔(河南屯) 남산(南山)사지, 고산(高產)사지 등이 있다. 그 외에 용해고성 부근과 정효공주묘 부근에서 건축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아뭏든 이러한 발해시기의 유적들은 서고성이 발해시기에 중요한 성의 하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정효공주묘, 하남둔고분의 발견은 그러한 추측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주석

58)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앞책 p. 7
59)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216 주38 
60)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p. 8
61) 齋藤甚兵衛(優), 〈間島省海蘭平野の渤海遺蹟〉《考古學雜誌》40―1, 1954, p. 10
62) 嚴長錄, 〈和龍縣西古城及其附近渤海遺迹調査〉《傅物諸研究》1984―1, 참조
63)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p. 14, pp. 17∼1
64) 주영헌은 외성과 내성 사이에 중성을 설정하여 서고성을 3중성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외성, 내성의 구별 방식을 따르겠다.
65)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pp. 14∼15
66) 李健才·陳相偉, 〈渤海的中京和朝貢道〉《北方論叢》1982―1
孫進己, 〈渤海疆域考〉《北方論叢》1982―4, pp. 82∼83
丹化沙, 〈關于興隆寺與渤海大石佛〉《北方論叢》1980―6, 1983 pp. 16∼17
67) 그러한 예로서 왕승례를 들 수 있다.
왕승례 저·송기호 역, 앞체 p.80
68) 鳥山喜一·藤田亮策, 《間島省古蹟調査報告》滿洲國 民生部, 1942
齋藤甚兵衛, 《半拉城―渤海の遺蹟調査―》琿春縣公署, 1942
郭文魁, 〈和龍渤海古墓出土的幾件金飾〉《文物》1973―8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渤海貞孝公主墓發掘清理簡報〉《社會科學戰線》 1982—1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延邊文化館, 〈和龍北大渤海墓葬清理簡報〉《東北考古與歴史》1, 1982
李健才·陳相偉, 〈渤海的中京和朝貢道〉《北方論叢》1982―1
鄭永振, 〈和龍縣龍海古迹調査〉《黑龍江文物叢刊》1983―2
延邊博物館, 〈和龍縣龍海渤海墓葬〉《博物館研究》1983-3
嚴長錄, 〈和龍縣西古城及其附近渤海遺迹調査〉《傅物諸研究》1984―1
何明, 〈吉林和龍高產渤海寺廟址〉《北方文物》19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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