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hn_019_0070&fileName=hn_019_0070.pdf
*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Ⅴ.연구 현황과 문제점 - 3.동아시아 도성 체제와의 관련"만 가져왔습니다.
발해 도성의 동아시아 도성 체제와의 관련
1989년 송기호
발해의 도성인 동경성이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대체로 제3대 문왕대에 상경으로 천도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성은 중국식 도성 체제를 따랐던 당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발해만이 당의 도성 체제를 따른 것이 아니고, 일본도 동일한 상황이었으며,12) 신라도 일부 장안성 제도를 도입하여 왕경을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123) 따라서 이 시기 동아시아 각 국이 도성 체제에서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이 되고 있다.
당의 도성은 왕성이 전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와 북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가 있는데, 당 장안성은 후자에 속한다.124) 후자와 같은 도시계획은 이미 북위(北魏)의 낙양(洛陽), 동위(東魏)의 업도(鄴都), 수(隋)의 대흥성(大興城) 등에서 비롯되어 당의 장안성에 이르러 완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발해, 요, 금 및 원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등원경(藤原京), 평성경(平城京) 등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125)
발해의 동경성은 당의 장안성 다음으로 큰 규모로서 8,9세기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커다란 도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126) 당시 동아시아에서의 발해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상경 성지 외에 동경용원부 소재지인 팔련성, 중경현덕부의 소재지인 서고성도 이러한 체제를 따랐고, 심지어 솔빈부의 소재지로 여겨지는 대성자고성의 평면도 이들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발해 후기에 이르러 지방제도의 확충과 함께 도성이나 지방 주요 거점 도시의 성들을 중국식으로 건설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127)
이상 발해의 성지 조사 및 발굴과 관련하여 연구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최근의 성지 조사와 더불어 발해의 주요 대외 교통로인 용원 일본도(龍原 日本道), 압록 조공도(鴨淥 朝貢道), 장령 영주도(長嶺 營州道) 등의 구체적 경로를 밝히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128)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주석
122) 佐藤武敏, 《長安》近藤出版社, 1971 pp.250∼260
關野雄, 〈周邊池域との關係―中國―〉 《日本の考古學》Ⅶ. 歷史時代(下), 河出書房新社, 1978
123) 閔德植, 〈新羅王京과 韓·中·日 古代都城과의 比較考察〉 《崔永禧先生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탐구당, 1987
124) 駒井和愛, 〈中國の都城〉《中國都城·渤海研究》雄山閣, 1977 p.3
125) 駒井和愛, 〈中國の都城〉《中國都城·渤海研究》雄山閣, 1977 참조
126) 왕승례 저·송기호 역, 《발해의 역사》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번역총서 1, 1987 참고자료 1. p.84
127) 魏存成, 〈渤海城址的發現與分期〉《東北考古與歷史》1, 1982, pp. 93∼94
128) 李健才·陳相偉, 〈渤海的中京和朝貢道〉《北方論叢》1982―1, pp. 76∼78
王俠, 〈琿春的渤海遺迹與日本道〉《學習與探索》1982―4, pp. 124∼126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吉林汪清考古調査〉《北方文物》1985―4, 1985 pp. 10∼1
張殿甲, 〈渾江地區渤海遺迹與遺物〉《博物館研究》198―1,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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