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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지역의 부거석성 고찰 - 윤현철"중에서 "4.부거성=동경설의 문제점"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부거성=동경설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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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거성=동경설의 문제점
2012 윤현철
2009년 9월 필자는 중국 연변대학교 발굴팀 일원으로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일대의 발굴조사에 참여하였다. 답사과정에서 부거석성설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첫째, 한 나라의 수도는 정치・경제・문화・군사 및 대외 왕래의 중심지로써, 국가 혹은 정권의 통치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대의 통치자들은 수도 건설에 매우 큰 힘을 기울여 왔는데 발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경과 상경, 팔련성은 모두 발해 경내에서도 지세가 상대적으로 평탄하고도 넓은 하천의 충적평원 혹은 산간분지에 위치하고 있어 도시의 건설과 확대에 적합하였다. 주위는 뭇 산에 둘러싸여 천연 병풍을 이루고 있어 군사방어에 유리하였으며, 토지가 비교적 비옥하고 물 자원이 풍부하며 기후가 좋아 농업생산의 발전에 적합하였다.
그러나 동경으로 비정되는 부거리의 자연지리 환경을 살펴보면 수도의 위치에 부합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대봉을 비롯한 여러 산봉우리들이 부거리의 동쪽과 서쪽, 북쪽을 에둘러 막고 있으며, 부거리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부거천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길 하나밖에 없다. 부거석성의 동북쪽은 산기슭을 가까이하고 있고 남쪽과 서쪽은 비교적으로 앞쪽이 트여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대체로 반원형, 방향은 190゚,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1500m일 뿐이다.
국내외학술계는 보통 발해국의 중경・동경과 상경은 모두 동일한 시대, 즉 문왕 대흠무시기에 건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0)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위에서 서술한 3경이 비록 모두 동일한 시기의 발해 수도들이기는 하지만, 중경현덕부가 제일 먼저 건설되었으며, 그 건설과 발전은 그 후의 상경용천부와 동경용원부의 건설과 발전에 참고로 될 만한 성공적인 경험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경으로 비정되는 부거리의 자연지리 환경을 살펴보면 수도의 위치에 부합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대봉을 비롯한 여러 산봉우리들이 부거리의 동쪽과 서쪽, 북쪽을 에둘러 막고 있으며, 부거리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부거천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길 하나밖에 없다. 부거석성의 동북쪽은 산기슭을 가까이하고 있고 남쪽과 서쪽은 비교적으로 앞쪽이 트여있다. 성의 평면 형태는 대체로 반원형, 방향은 190゚,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1500m일 뿐이다.
국내외학술계는 보통 발해국의 중경・동경과 상경은 모두 동일한 시대, 즉 문왕 대흠무시기에 건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0)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위에서 서술한 3경이 비록 모두 동일한 시기의 발해 수도들이기는 하지만, 중경현덕부가 제일 먼저 건설되었으며, 그 건설과 발전은 그 후의 상경용천부와 동경용원부의 건설과 발전에 참고로 될 만한 성공적인 경험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성곽의 규모와 구조로 보아 경, 부의 성곽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금 학계에서 경, 부, 주의 소재지라고 거론되던 성들을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발해국의 경이나 부의 치소로 확정 혹은 추정되는 성곽들은 대체로 둘레가 2,000m 이상이다. 예하면 상경성(16,839m), 팔련성(동경용원부, 2,894m), 서고성(중경현덕부, 2,720m), 청해토성(남경남해부, 2,132m), 소밀성(장령부, 2,590m), 대성자고성(솔빈부, 3,750m)이다. 주급이라고 추정되는 성들의 둘레의 길이는 대체로 1,000m 이상이다. 예하면 동단산고성(속주, 1,050m), 대상둔고성(속주, 1,061m), 유수천성(풍주, 1,455.6m), 경영고성(목주 혹은 하주, 1,200m), 계관고성(독주주, 1,690m), 용두산고성(발주,1,680m), 남성자고성(발주, 2,060m), 크라스키노고성(염주, 1,380m)이다.
일부 학자들은 중경과 동경, 상경용천부의 황성・궁성은 대흠무 시기에 건설되었는데 “모두 남북이 긴 방형으로써 종횡 비례가 아주 흡사하며”, “모두 성 안을 대체로 3개 부분 7개 구역으로, 즉 북부에 1개 구역, 중부에 3개 구역, 남부에 3개 구역으로 되어 있다.”21)라고 주장한다. 고고자료에 의하면 중경현덕부 외성의 둘레의 길이는 2,720.1m, 상경용천부 내성의 둘레의 길이는 2,880m, 팔련성 외성의 둘레의 길이는 2,894m이며 모두 2중성 구조이다. 비교를 통하여 상경 궁성의 규모와 서고성・팔련성의 규모는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효동과 위존성은 “서고성의 남북 길이는 726m, 동서 너비는 628m이며 정연한 세로로 놓인 장방형이다. 팔련성의 남북 길이는 약 740m,동서 너비는 약 706m인데 그 총체적인 형상이 방형에 가깝다.” “현존하고 있는 상경성 궁성유지는 남북 길이가 720m, 동서 너비는 620m이며, 역시 정연하고 세로로 놓인 장방형이며, 규모 및 형제(形制)가 중경 서고성과 같다. 응당 설명하여야 할 것은 상경성의 궁성 성벽은 돌로 쌓은 것이지만 중경성은 흙으로 쌓아 서로 같지 않다. …… 그리고 상경성의 궁성이 이른바 남북의 길이가 720m, 동서 너비가 620m라는 수치는 두 성벽 두께의 중간치까지 계산한 것이다. 돌로 된 성벽 본신의 두께는 5m좌우인데, 내외의 흙으로 된 성벽 두께를 더하면 10여m에 달한다. 만약 성벽 두께를 포괄하여 계산하면, 서고성의 남북 길이 729m, 동서 너비 628m와 거의 일치한 수치를 얻어낼 수 있다.” “양자는 또 규모가 같을 뿐만 아니라 형제(形制)도 같았으며 심지어 내부구조도 의외로 비슷한 점이 있었다. …… 무릇 서고성에 있는 주체 건축유지, 심지어는 세부구조까지도 상경성 궁성유지에서 그와 상응한 것들을 거의 모두 찾아낼 수 있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22) 그리고 팔련성 유지의 내부구조도 아주 비슷한데, 다만 규모가 좀 클 뿐이다. 때문에 현존의 상경 궁성유지가 소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흠무시기에 제일 먼저 기획하고 건설한 수도 상경이라는 것을 판정할 수 있다.
정원시기에 대흠무는 수도를 동경으로 천도하였다. 이 시기는 대흠무가 상경에서 “문치”를 실시한지 30년이나 되어 발해국의 국력이 비교적 강하였으며, 천도를 결정한 이상 필연코 혼신의 힘을 다해 새 수도를 영조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동경에 대한 기획은 응당 당시의 상경보다 컸을 것이며 적어도 상경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팔련성은 외성과 내성 2중성 구조이다. 성터는 대체로 3부분 8구역으로 나뉜다. 그중에서 중부에 3개 구가 있고, 남부에 4개 구역이 있다. 외성 성벽의 남쪽 길이는 701m, 북쪽 길이는 712m, 동쪽 길이는 746m, 서쪽 길이는 735m, 둘레의 길이는 2,894m이다.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 그중에서 남쪽 성벽의 동쪽부분과 북쪽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높이는 1m, 너비는 6m이다. 외성에 모두 4곳의 성문이 있는데 각기 여러 성벽의 중부에 설치되어 있다. 성벽 밖 6m되는 곳에 호성하 유적이 있다. 내성은 중부의 중구에 위치해 있는데 이 성터의 핵심이다. 성벽은 남북 길이가 318m, 동서 너비가 218m, 둘레의 길이가 1,072m이다. 성벽은 흙으로 쌓았으며, 성벽의 너비는 6m이다. 중경현덕부의 내성과 마찬가지로 이 성의 내성도 남쪽 성벽의 중간부분이 안으로 꺾어 들어갔다. 내성 성벽의 남・동・서쪽의 중부에 성문이 각기 하나씩 나있는데, 그중에서 남쪽문의 너비는 25m이다. 내성에는 모두 8곳의 건축유적이 있다. 그중에서 내성의 중축선 위에 위치한 것이 2곳이다.
그러나 부거석성은 둘레의 길이가 1,236m 밖에 되지 않으며 외성자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필자는 부거석성을 경, 부급의 성곽으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주급 성곽에 해당된다고 본다.
셋째, 신라도는 신라로 가는 주요 교통로이다.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이지만, 발해와 신라가 장기간 적대상태였기 때문에, 쌍방이 이 교통로를 이용하여 관방왕래를 한 차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료에 신라가 발해국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은 2번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발해는 항해에 능숙하여 바다로 하여 신라에 도착하는 노선이 육로를 경유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였다. 이밖에 신라도 연선에는 수많은 역참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가능하게 군사 목적에서일 것이다.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였다는 것과 826년에 신라왕이 1만 명의 인부를 징집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축조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신라도가 봉착한 형세를 보여준다.
부거석성은 삼면이 산에 둘러 있어 부거리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은 오직 산세와 부거천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길 밖에 없다. 부거리 내의 독동봉수대, 독동산성, 부거토성, 부거리평원성, 연대봉봉수대, 바른골봉수대, 김삼득봉수대, 추골1봉수대, 추골2봉수대, 암기동봉수대, 등수무산봉수대, 간농봉수대, 온수동봉수대(부거천서쪽지류,간농촌부근에서 합수) 등의 유적들은 남북 20km, 동서 15km 범위 안에 분포되었다. 이 유적들은 주요하게 남북향으로 나진과 선봉 방향으로 분포되었으며, 부거리 동쪽(해안)에는 연대봉을 비롯한 여러 산봉우리들이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는데 그 위에는 봉수대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용제항이 교통요충지로서 지리적 우월성을 갖추고 있으며, 북쪽 방향(팔련성)으로의 소식 전달에 용이하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즉 부거리 내의 유적들은 용제항의 방어와 해안선 관측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넷째, 성벽 축조방식이 특수하다. 성벽은 성의 방어력을 강화하여 적의 침입을 막아 안전을 도모하는 방어시설이다. 발해는 성곽을 축성함에 있어서 주로 흙과 돌 두 가지 재료를 사용하였다. 흙으로 쌓은 성을 토성, 돌로 쌓은 성을 석성,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성을 토석혼축성이라고 한다. 이외에 성벽의 대부분을 흙을 쌓고 개별적인 구간을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도 있으며, 또 성벽의 기초는 돌로 쌓고 기초 윗부분을 흙으로 쌓은 것이 있다. '고구려・발해고성지연구휘편'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견된 발해시기의 토성은 97개, 석성은 43개, 토석혼축성은 31개다. 일부 구간을 흙 혹은 돌 혹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것이 5개이고 축성재료를 판정하지 못한 것이 11개이다.23) 이로부터 발해국의 성곽형태에서 토성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토석혼축성이고, 석성이 제일 적다.
서고성과 팔련성은 모두 토성이다. 그러나 부거석성은 석축성인데 평지성에서 특수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성벽 방어시설을 보면, 발해국의 일부 평지성들에서 각루・치・옹성・해자 등 시설들이 발견되었으나, 점차 설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한 측 고고일군의 말에 의하면 성벽에 각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 축성시간 판정과 외성이 있다는 관점에 의구심이 든다.
다섯째, 발해의 역사에서 동경용원부를 수도로 삼았던 시기는 대흠무의 통치 말기이다. 대흠무가 적극적으로 문치를 실시하고, 전면적으로 당조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정책의 영향으로, 발해는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룩했으며, 사람들의 사상・관념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발해문화를 언급하며, 불교가 발해문화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교문화는 대흠무시기에 발해국의 문학・건설・예술 방면에 깊이 침투하였으며, 해동문화를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대흠무가 “효감금륜성법대왕”이란 존호를 받고, 불가의 대표로 자처하였는데, 이것은 발해국에서 불교의 숭고한 지위를 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의 도성에도 불교유지가 남아있어야 한다고 보여 진다. 지금까지 발견된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상경유지 근처에서 발견된 불교유지는 10여 곳이며, 길림성 서고성 중경현덕부 유지 근처에서 발견된 불교유지는 18곳이다.
그러나 동경유지로 비정되는 부거석성 근처에서는 불교사원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팔련성 근처에서 9곳이 발견되었다.
여섯째, 무덤형식과 출토유물이 특이하다. 부거리 일대의 무덤은 대부분 규모가 크고, 지상축조 형식이며, 대체로 석실봉토분, 석곽봉토분, 석관봉토분으로 분류된다. 연차골과 다래골에 축조된 무덤은 전부 지상축조형식이다. 부거리 일대의 석실봉토분은 대부분이 타원형 혹은 원형으로 되었고 천정은 궁륭식으로 되었다.24) 이 형식은 재래의 방형, 장방형, 삼각고임, 평행고임, 평천정형식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또 부거리 일대의 석실봉토분에서 목관을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묘실 내에 석관을 설치하였다. 다래골과 연차골의 대부분 석실봉토분에 한 개 혹은 두 개의 석관을 설치하였고 석관을 하나만 설치한 무덤에서도 석관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빈자리에 석관을 축조할 판석을 그대로 방치한 상황도 보인다. 이것은 다른 지역의 고분들에서, 특히는 상경과 중경으로 비정되는 발해진과 서고성 근처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유물로 볼 때 마구가 출토되는 수가 상대적으로 많다. 연차골 1지구 1, 2, 12, 15호 무덤에서 모두 재갈과 등자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를 보면 대부분 회색 혹은 흑회색으로 된, 태질이 단단하고 구운 온도가 높은 윤제 토기다. 단지 중 어깨에 세 개의 대칭되는 손잡이를 마련한 것이 많고 말갈토기(쌍진통형관)들이 발견되지 않는데 이 지역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주석
20) 李健才・陳相偉, 「渤海的中京和朝貢道」, '北方論叢', 1982년 제1기, 72쪽; 朱國忱・魏國忠,'渤海史稿', 黑龍江文物出版編輯室, 1984년 內部版, 60쪽; 王承禮, '中國東北的渤海國與東北亞', 吉林文史出版社, 2000년版, 96쪽; 魏國忠・朱國忱・郝慶雲 著, '渤海國史',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6년版, 109~110쪽; [日] 駒井和愛 著, 「渤海的五京及其特產」, '民族譯叢', 1984년 제4기, 48쪽; 譯自 '中國都城・渤海硏究', 1977년 일문판.
21) 魏存成, 「關於渤海都城的幾個問題」, '史學集刊', 1983년 제3기, 12~13쪽.
22) 劉曉東・魏存成, 「渤海上京城營築時序與形制淵源研究」, '中國考古學會第六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90년版, 180~181쪽
23)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哈爾濱出版社, 1994
24) 延邊大學 渤海史硏究所, '富居里一帶的渤海遺跡', 香港亞洲出版社,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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