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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사즉생(死則生)하라!”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㉗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41호] 승인 2014.04.14 13:46:19
불멸의 신화 , “나에겐 13척이 있다” 대승 병법
삼지(三止): 임금의 명을 거스를 땐 목숨을 던져라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13척의 전선으로 수 백 척의 일본군 전선을 마주하기 전날, 부하 장수들에게 한 연설문의 일부가 나온다. 《오자병법》을 이순신이 재해석한 것이다.
▲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고 했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상식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7월에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전투 중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 전멸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6년 동안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의 신화는 그렇게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았다. 소수였지만,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장수들과 군사들은 일본군에 대한 공포에 질려있었다. 고양이만 봐도 호랑이라고 생각할 만큼 오금을 절였다. ‘불멸의 신화를 만든 이순신일지라도 감히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며 리더 이순신을 의심했다.
그만큼 참혹한 패배였다. 충청 수사 최호는 물론 이순신과 함께 전쟁터를 누빈 백전 노장이었던 전라 우수사가 전사했다. 불신의 대상이었고, 무능한 사령관이었던 원균도 전사했다. 도망친 겁쟁이 경상 우수사 배설을 제외하고 수군 지휘부는 사실상 전멸했다. 전쟁과 전염병, 굶주림 속에서 6년 동안 만들었던 전함 백 수 십 척도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자포자기 대신 먼저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죽고자 한다면 오히려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죽음의 길이 거꾸로 생명의 길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길이라는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한 명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천명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좁은 길목이라면 천 명도 한꺼번에 덤빌 수 없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그의 주장처럼 죽을 각오를 한 13척의 전선으로 10배에 달하는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다.
‘처음처럼’ 대신 ‘처음과 같이’
그러나 이순신은 명량해전과 같은 무모한 선택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1597년 3월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의 위기를 맞았다. 선조와 조정 신하들은 이순신에게 재침해오는 일본군을 부산 앞바다에 가서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 부산까지 가서 전투를 할 형편이 못되고, 부산에서의 전투는 패배가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 순자(荀子, 기원전 313?~283)가 쓴 <의병(議兵)>은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운용하는 원칙, 리더의 덕목과 행동 지침이 그 어떤 고전이나 병법서보다 탁월하다. <의병(議兵)>에는 이순신이 자주 썼던 표현들도 나온다. “끝과 처음을 한결같이 하라(終始如一 종시여일)”, “한마음(一心)” 등이 그것이다.
▲ 끝맺음을 신중하게 하기를 처음처럼 하고, 끝과 처음을 한결같이 하는 것(愼終如始, 終始如一 신종여시, 종시여일)을 일러 크게 길(吉)한 것이라고 한다. (<의병>)
▲ 무릇 어진 사람의 군대는 장수와 군사들이 한마음이 되고 전군이 함께 힘을 합친다(上下一心, 三軍同力).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아우가 형을 공경하듯 하고, 손과 팔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고 가슴과 배를 덮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용병의 핵심은 장수와 군사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병>)
이순신은 순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 여러 장수들에게는 “한번 승첩했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군사를 위무하고 전선을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급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되 끝과 처음을 한결같이 하라(終始如一, 종시여일)”고 엄하게 신칙하고 진을 파했습니다. <제2차 당포ㆍ당항포 등 네 곳의 승첩을 아뢰는 계본(唐浦破倭兵狀)>
▲ 나는 한마음(一心)으로 충효만 생각했다. 《이충무공전서》
순자와 이순신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한마음(一心)’, 그런 자세가 언제나 변함없이 같아야 한다는 ‘종시여일(終始如一)’의 자세를 강조했던 것이다. 특히 이순신은 그 원칙을 솔선수범해 철저하게 지켰기에 그의 군대는 자식이 부모를 진심으로 섬기는 것과 같은 한마음의 군대가 되었다.
모두를 위해 삼지(三止)하라!
이순신에게 지혜를 주었던 순자의 <의병>에는 장수 이순신에게 깊이 번뇌해야 할 가르침도 있다. 이순신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감옥에 가야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순자는 장수가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서 여섯 가지 행동방침(六術), 다섯 가지 권도(五權), 세 가지 지극한 것(三止)을 말한다. 그 중 삼지(三止)는 ‘세 가지 지극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순신이 1597년 초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근거이다.
‘삼지(三止)’는 장수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임금의 명령을 거부해야 할 때를 말한다.
첫째, 장졸들을 위태로운 곳에 몰아넣어서는 안된다(不可使處不完, 불가사처불완). 둘째, 이길 수 없는 적을 공격해서는 안된다(不可使擊不勝, 불가사격불승). 셋째, 백성을 속여서는 안된다(不可使欺百姓, 불가사기백성).
이순신은 삼지(三止)를 철저히 지켰다. 그는 패배가 예견되거나 큰 피해가 우려될 상황을 단호히 피했다. 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전투를 했다. 또한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군사와 백성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보내지 않았다. 이길 수없는 전투를 이긴다고 속이지 않았다.
이순신이 1597년 초의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군사와 백성을 죽음의 땅에 내몰지 않으려는 삼지(三止)의 결단이었다. 이순신의 결단은 얼마 후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던 원균이 선조와 조정의 무리한 명령으로 칠천량에서 대패한 것에서 증명된다.
순자는 육술(六術)·오권(五權)·삼지(三至)를 신중하고 겸손하게 실천하고, 태만하지 않는 장수를 “천하의 장수(天下之將)”라고 부르며, 그런 장수는 “신명(神明)과도 통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순신이 바로 그런 장수이다. 군사와 백성, 나라를 위한 한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 결정을 실천하기 위해 과감히 던졌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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