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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 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28)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라!”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42호] 승인 2014.04.21 14:29:31
조선시대 선비들은 대부분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서재가 있었다. 이순신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인 류성룡에게는 <원지정사(遠志精舍)>와 <옥연서당(玉淵書堂)>이 있었다. 원지정사는 그가 젊었을 때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와 안동 하회에 세운 것이다. 세속과 떨어져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옥연서당은 1599년 7년 전쟁이 끝나고, 이순신의 전사와 자신의 삭탈관직 후 낙향했을 때 세웠다.
옥연(玉淵)은 “구슬의 깨끗함과 연못의 맑음은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道)”라는 뜻이다. 류성룡의 두 서재의 이름에는 각각 젊은 시절의 류성룡과 은퇴한 류성룡이 추구한 삶의 자세가 들어있다. 객기가 넘쳤던 젊은 시절에는 절제를 목표로 했고, 권세영화와 간난신고를 다 맛 본 뒤에는 유종(有終)의 미(美)를 추구했다. 그런 그였기에 옥연서당에서 임진왜란의 고통스런 기억을 반추해 비극의 역사가 재현되지 않도록 후세에 경고하는 목적의 《징비록》을 썼다.
정약용의 전남 강진 서재 이름은 <삼사재(三斯齋)>이다. “거칠고 태만함을 멀리하며(斯遠暴漫, 사원폭만), 비루하고 패려함을 멀리하며(斯遠鄙倍, 사원비배), 진실에 가깝게 한다(斯近信 사근신)”라는 세가지 삼갈 것(三斯)을 마음에 새기고자 했다. 남명 조식(曹植)은 1548년에 합천에 살 때 <뇌룡사(雷龍舍)>를 지었다. '뇌룡(雷龍)'에는 산림에 묻혀 사는 이름 없는 처사일지라도 용과 우레의 기상을 품고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싸우기 전에 이길 수 있는 힘
이순신에게도 그와 같은 서재가 있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언급된 이순신의 서재는 '운주당(運籌堂)'이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이 한양을 압송당하기 직전까지 3년 8개월 동안 거처했다. 이순신의 후임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하면서 후퇴하던 조선 수군이 불태우는 바람에 없어졌다. 1739년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 터에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제승당(制勝堂)'이라고 새로 명명했고, 그 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순신이 자신의 서재를 운주당으로 지은 이유는 사마천의《사기》에 나오는 운주(運籌)의 유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방은 최고의 라이벌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제패한 뒤 그를 도와 대업(大業)을 이루게 만든 장량(張良)의 공로를 “진영의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내 천 리 밖의 승리를 결정했다((運籌策惟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운주책유장지중, 결승어천리지외)”고 평가했다. 그 내용 중에 계책을 만든다는 뜻의 ‘운주(運籌)’를 이순신은 자신의 서재 이름으로 쓴 것이다. 훗날 조경이 제승당으로 지은 것도 같은 유래이다.
이순신은 운주당을 장량의 장막처럼 위태롭지 않고(不殆)와 패하지 않는(不敗) 전략을 만드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이순신의 운주당은 불이 꺼지지 않았고, 또 그 어떤 신분의 인물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앴다. 그는 탁월한 천재 한 사람의 지혜도 중요하지만, 평범한 열 사람, 천 사람, 만 사람의 지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경청하려고 했다. 이순신의 운주당과 그의 한결 같은 그런 태도가 손자병법에서 최고의 전략이라고 평가하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전략을 만들 수 있었던 원인이다.
이순신이 부하장수들과 얼마나 많이 토론했고, 경청했는지는 《난중일기》와 그의 보고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그의 표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同論籌計, 동론주계).”
▲ “온갖 방책을 의논했다(百爾籌策. 백이주책).“
▲ “밤낮 의논하면서 약속했다(日夜謀約, 일야모약).”
또한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成大中)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도 경청하는 이순신이 모습이 나온다.
▲ 이순신(李舜臣)이 처음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었을 때, 왜적이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가 많았다. 바다에서 왜적을 막아야 하는데, 공(이순신)은 바다의 요해처를 알지 못했다.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게 하는 등,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한 뒤 밤에는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공은 평복을 입고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아주 두려워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친해져 공과 함께 웃고 농담까지 했다. 그 때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를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이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배가 뒤집히는 곳, 암초가 있어 배가 부서지는 곳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은 하나하나 자세히 듣고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접 현장에 가서 살폈고, 거리가 먼 곳은 부하 장수를 보내 살피게 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고의로 후퇴해 적들을 그 때 들었던 험지로 유인해 힘을 들이지 않고 격파했다.
이순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백성과 부하들과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에 대해 토론했고 귀를 기울였다. 부하들의 말을 들어주는 리더, 계급이나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 리더였기에 누구나 새로운 대안, 창의적인 생각을 제안할 수 있었다. 때문에 부하들도 마음을 다해 그에게 충성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본군과 전투를 할 때 나타났다. 이순신과 그의 부대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일본군보다 여유가 있었고, 지치고 피곤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반면에 원균은 달랐다. 그가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운주당은 이순신의 운주당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변했다. 안팎으로 울타리를 겹겹으로 쳐 놓고 장수들까지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애첩과 놀고 술 마시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경청하지 않는 리더, 원균이 칠천량에서 전멸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운주당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 리더 한 사람의 태도가 그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는 조직이 클수록 리더의 능력을 폄하하는 경향이 많다. 리더와 리더십 보다도 조직과 시스템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순신과 원균의 사례뿐만 아니라 성공한 조직과 실패한 조직에는 언제나 최고의 리더와 최악의 리더가 있다. 경청하는 리더,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리더는 언제나 성공했다. 반면에 귀를 닫은 리더, 자신만이 최고라는 착각에 빠진 리더는 자신은 물론 조직원들의 삶까지도 참혹하게 만들었다.
위대한 논쟁의 출발은 믿음
이순신처럼 군사들과 백성들의 믿음을 얻고, 함께 땀을 흘릴 때는 그 어떤 장소라도 성공전략을 세울 수 있는 운주당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술자리와 회식자리도 운주당이 될 수 있다. 리더의 방, 리더가 있는 모든 곳을 경청의 운주당으로 만들 때 창조와 성공이라는 자녀가 잉태될 것이다.
※ 이 칼럼은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스타북스, 2011)에 썼던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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