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53
감자탕엔 왜 감자가 없을까
감자탕은 태생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서울에서 노동을 팔던 이에게 돼지 등뼈와 감자는 훌륭한 안주 겸 끼니였다.
그런 음식의 이름을 뼈다귀탕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입력시간 [223호] 2011.12.30 09:05:17 조회수 37962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음식명은 주요 재료와 요리법 또는 완성된 요리의 형태 등에 따라 붙이는 것이 관례이다. 음식 이름만 듣고도 그 음식으로 기대되는 맛을 예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관례일 뿐이지 변칙은 항상 존재한다. 닭채소볶음이라 해야 마땅한 음식을 닭갈비라 부르고, 교과서에까지 계삼탕이라 했던 음식을 삼계탕이라 우겨 말하는 식이다.
감자탕도 이 변칙의 음식명인 셈이다. 감자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주요 재료는 아니다. 돼지 등뼈를 푹 삶아서 감자, 우거지 등을 넣고 끓여내는 음식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돼지등뼈감자우거지탕’이라 해야 맞다.
영등포 할매집의 ‘할매’(오른쪽). 주인은 아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대구로 나가 식모살이를 했으며 서울로 와서 여기 감자탕집에 터를 잡았다. 서울에서 감자탕 먹는 인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황교익 제공
감자뼈라는 이름 가진 돼지 뼈는 없어
어느 방송에서 감자탕의 어원을 밝힌 적이 있다며 그 내용이 인터넷에 떠도는데, 이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감자탕의 주요 재료인 돼지 등뼈를 감자뼈라고 불러서 감자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방송에 나왔다” 하면 무조건 신뢰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 ‘설’은 엉터리이다.
한반도 사람들은 먼 선사시대부터 돼지를 키웠다.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돼지로 여러 음식을 해먹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흔히 먹는 음식의 재료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이름이 붙는다. 돼지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등뼈를 감자뼈라고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자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겨우 1800년대 초의 일이다. 또, 이게 일상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그러니까 수천 년 내려온 돼지뼈 이름에 100여 년짜리 감자라는 이름이 끼어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축산 전문가들도 감자뼈라는 이름의 돼지뼈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정육점이나 장터에 가면 돼지 등뼈를 진열해놓고 ‘감자뼈’라고 이름 붙여 파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감자뼈가 있기는 있는 것 아니냐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감자탕이 유행하면서 ‘감자탕용 돼지뼈’를 파는 가게가 생겼을 것이고, 이 가게 주인들이 ‘감자탕용 돼지뼈’니 ‘돼지 등뼈’니 하는 식으로 표시하는 것보다 ‘감자탕뼈’, 나아가 ‘감자뼈’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고 손님도 쉽게 알아볼 것이라 판단해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감자탕의 유래에 대한 또 하나의 ‘설’이 있다. 강원도에서 유래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감자 생산량이 많았던 것은 맞다. 그러나 감자가 쌀에 비해 많은 것이지 그 총량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아니다. 늘 식량이 모자라던 강원도에서 감자가 주식 노릇을 하여 ‘강원도 감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졌을 뿐이다. 또, 감자탕 같은 음식을 조리하자면 돼지 등뼈도 넉넉해야 하는데, 강원도에서 특별히 돼지를 많이 키웠다는 자료가 없다. 돼지를 키우려면 음식물 쓰레기라도 많아야 한다.
강원도처럼 먹을 게 부족한 지역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이 버거운 일이다.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 강화도 등지에서는 먹이가 마땅히 없어 똥을 먹이며 돼지를 키웠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감자 몇 알에 돼지 등뼈 듬뿍 들어간 감자탕을 보면, 오히려 돼지를 많이 키웠던 지역을 찾아 그곳에서 유래한 음식이라 하는 것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한반도의 옛사람들은 쇠고기를 넉넉히 먹지 못했다. 농사를 도와야 하는 소를 함부로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돼지는 그런대로 제법 먹었을 것이다. 아무것이나 잘 먹고 새끼도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그렇게 넉넉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돼지를 잡으면 악착같이 살을 발라 먹었을 것이다. 이 ‘악착같이’에서 감자탕의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감자탕이 아니라 ‘뼈다귀탕’이었다
돼지를 잡으면 버리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뼈와 털 정도였다. 뼈도 푹 고아 먹었다. 그래도 살이 가장 중요한 부위여서 이 살을 발라내는 데 온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살을 알뜰히 발라낼 수 없는 부위가 있다. 바로 등뼈이다.
이 등뼈는 굴곡이 져 있다. 칼로 등뼈의 살을 아무리 발라내도 발리지 않는 살이 있다. 이 살을 가장 쉽게 먹는 방법은 삶는 것이다. 삶으면 살을 바를 수 있다. 그러니까 ‘돼지등뼈탕’은 돼지를 사육한 먼먼 선사시대 때부터 있었던 음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솥이 있어야 했으니,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음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감자탕에 든 등뼈는 그래도 살이 많은 편이다. 감자탕용으로 살을 좀 남겨두기 때문이다. 예전의 감자탕 등뼈는 발라 먹을 것이 정말 적었다. 겨우겨우 붙은 살을 쪽쪽 빨아 먹었다. 그래서 이 탕의 애초 이름은 뼈다귀탕이었다. 뼈다귀국, 뼈다귀해장국이라고도 했다. 살이 워낙 적으니 그릇에 등뼈를 가득 채워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뼈다귀탕이었던 것이다. 국물을 거의 없이 내는 것도 있었는데, 이를 두고 ‘따귀’라고도 불렀다(소의 등뼈도 이 이름으로 팔렸다).
이 뼈다귀탕에 언제부터 감자가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감자 재배가 부쩍 늘었는데, 그즈음에 지금의 감자탕 모양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쌀을 빼앗아가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먹고살 식량으로 감자와 고구마를 적극 보급했고, 그렇게 해서 흔해진 감자가 뼈다귀탕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아래 사진 왼쪽이 영등포역 앞 골목의 감자탕집들이다. 간판도 없다. 주변이 온통 재개발되고 있으니 이도 곧 사라질 것이다. ⓒ황교익 제공
뼈다귀도 그렇고, 감자도 그렇고, 감자탕은 태생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어느 특정 지역에서 유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층민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이 음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 감자탕을 서울 음식에 넣자고 생각한 것은 그 하층민이 가장 큰 집단으로 모였던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서 노동을 팔던 이에게 돼지 등뼈와 감자는 안주 겸 끼니가 되어주었으리라.
감자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서울에서의 일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먹는 게 ‘돼지의 뼈다귀로 끓인 탕’이니, 뼈다귀탕이라는 이름이 자신의 가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었을 것이다. 감자는, 고향에서 흔히 먹었던 그 감자는 향수를 불러오고, 그래서 내가 먹는 음식이 낯선 도시의 하층민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향에서 먹던 음식이었으면 하여, 감자 겨우 한두 알 든 돼지등뼈탕을 감자탕이라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영등포역 앞의 한 골목에 감자탕집이 모여 있다. 낡고 허름한 가게들이다. 1990년대 이후 프랜차이즈 업자들이 감자탕을 때깔 난 식당에서 먹는 음식으로 재구성하고 있지만, 감자탕의 유래를 생각하면 그런 데서는 진짜 맛을 느낄 수 없다. 가게는 좁아서 노천이다 싶은 곳에 놓인 나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감자탕이 진짜 감자탕이다. 돼지 등뼈 가운데 박힌 노란 속을 쪽쪽 빨며 ‘뼛골이 빠지는 삶’을 견뎌낸 서울 변두리 사람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감자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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