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40_0030_3140https://bit.ly/2M9BEEa


마선구 서대묘(麻線溝 西大墓)


서대총/서대묘 위치도 https://bit.ly/2M9BEEa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마선향 건강촌 5조.

좌표는 동경 126°7'39.99", 북위 41°5'44.07".(吉林省 集安市 麻線鄕 建江村 5組. 座標 東經 126°7'39.99", 北緯 41°5'44.07")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13조선총독부(관야정, 금서용, 곡정제일, 율산준일)
(朝鮮總督府(關野貞, 今西龍, 谷井濟一, 栗山俊一))
조사기간은 9월~12월임. 마선구 하천의 서쪽 산기슭의 고지대 서단에 위치. 전부 붕괴되어 돌산처럼 보임.
1935만주국문교부 위촉(삼택준성, 이등이팔)
(滿洲國文敎部委囑(三宅俊成, 伊藤伊八))

조사기간은 5월14일~5월19일임. 호태왕비의 보호상태 및 능비의 탁본제작하면서 부근의 고분조사를 진행함.
서대묘는 천추총에서 서방 약 1.5㎞ 떨어진 곳에 위치.

거대한 층단을 가진 방단형 석축 고분. 심각하게 훼손되었으나 기단 한 변의 길이는 50m정도에 달해 태왕릉과 동일한 구조로 추정됨.

출판물로는 三宅俊成의 『東北亞考古硏究』(1940년, 1942년, 1945년 조사를 보강, 정리하여 수록)이 있음.

1935만주국문교부 지원(지내굉, 빈전경작, 매원말치, 등전양책, 소장항길)
(滿洲國文敎部支援(池內宏, 濱田耕作, 梅原末治, 藤田亮策, 小場恒吉))
집안현 고구려유적 제1회 조사임. 조사기간은 9월28일~9월30일임. 조사유적은 집안현성, 산성자산성, 호태왕비, 장군총, 태왕릉, 임강총, 천추총, 서대총, 오괴분, 삼실묘, 산연화총, 사신총, 귀갑총, 무용총, 각저총, 환문총, 모두루총 등임.

만주국 안동성 시학관 伊藤伊八은 5월에 2기의 벽화고분을 새로 발견하여 관야정과 함께 통구지방 재조사를 추진하여 池內宏, 濱田耕作(경도제국대학)등이 동행하기로 하였는데 7월에 관야정이 죽으면서 지내굉과 빈전경작만이 조사에 참가. 마선구 서안에 황폐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고분이 확인됨.
1936만주국문교부 지원(지내굉, 빈전경작, 매원말치, 흑전원차, 삼상차남)
(滿洲國文敎部支援(池內宏, 濱田耕作, 梅原末治, 黑田源次, 三上次男))
조사기간은 9월30일~10월4일임. 조사유적은 집안현성, 산성자산성, 광개토왕릉비, 환문총, 모두루총, 태왕릉, 장군총, 천추총, 서대총, 임강촌, 무용총, 각저총, 삼실묘, 서강 122호분, 사신총, 모두루총, 서강 62호분 등.
1938등전양책, 야수건, 재등충
(藤田亮策, 野守健, 齋藤忠)
4월에 20일간 조사함. 통화-집안간 철도공사가 예정되면서 통구 고분군 중앙부가 파괴될 상황이었으므로 1937년 黑田源次에 의한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됨. 藤田亮策은 고분조선고분연구회 사업의 일부로 만주 당국에 요청하여 고분 배치상태의 실측을 시행함. 사진과 실측도 작성하고 고분배치도를 제작. 서대총은 천추총의 서쪽으로 십여 町(1.1㎞)떨어져 있음.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통구고분군에 대한 조사 당시 해당고분을 마선구0500호묘(JMM0500)로 편호함.
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지용, 이경빙, 경아남)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遲勇, 李景冰, 景阿男))
조사기간은 4월~7월 말임. 집안 고구려유적의 환경복원 작업 중에 정밀한 조사를 진행. 고분 전체의 실측과 동시에 고분의 서측과 북쪽의 흘러내린 돌을 중점 정리하였으며, 동측 계단은 북단의 23m와 동남 모서리 북쪽으로 12m 지점을 정리함. 높이는 제1단 계단으로 제한하여 정리하고, 상부의 계단은 부분적으로 해체하여 정리한 후에 다시 원래 형태로 메워 놓음.

능역 내 기타 유적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덤 주위에 6개의 탐색갱을 파냄. 동기, 철기, 토기, 석기 등 38건의 유물이 출토됨.

 


구조특징

 

유민들이 이 곳을 개간하면서 이 고분을 발견하고 ‘서대묘’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이 고분명칭이 오늘날까지 전해짐. 고분은 일찍 도굴당해 심하게 파괴된 상태, 고분 중앙에는 남북 방향으로 고분바닥에까지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음. 그 구덩이 깊이는 7m 정도이며, 묘실은 이미 완전히 없어져 존재하지 않음. 도굴되어 드러난 석재는 대부분 남측을 향해 쌓여 있는데 길이가 약 40m의 타원형 돌무지를 형성하고 있었음. 도굴로 남측의 상부 계단은 파괴되었고, 주위에는 백회가 묻은 석재가 흩어져 있었음. 서측의 중간 부분에서는 대량의 작은 강자갈이 발견되었는데 묘실 바닥부에 깔린 돌이 집중적으로 무너진 곳일 가능성이 있음. 도굴 구덩이가 너무 깊어져 외부의 장력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묘장 동측과 서측의 남쪽 계단은 안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으며, 동남과 서남의 두 모서리 역시 안쪽으로 기울어짐. 북측은 높은 곳이기 때문에 떨어져 내린 돌은 있으나 재차 묻혀 변형된 정도가 가장 적음. 서측의 중앙부가 약간 허리가 잘록하게 된 것은 변형 때문일 가능성이 있음. 묘장의 동측과 서측은 북쪽에서 23m 되는 곳에서 제1단 계단이 모두 안으로 1m 정도 들여 있는데 적석의 중력에 의해 기단이 밖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있고, 축조 당시 하층 계단이 단계별로 나누어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제2단 계단이 단절없이 이어진 정황을 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있음.


서대묘는, 계단광실묘로 평면 사다리형임. 고분이 변형된 현재 상황에서 파악되는 사면 둘레는 차이가 있는데 동측과 북측의 길이가 각기 53.5m, 서측 길이 56.7m, 남측 길이 62.5m임.


서대묘 내부에는 크기가 다른 산자갈로 쌓았고, 외부는 다듬어 정제한 계단면석을 둘러 쌓았음. 계단석재에는 화강암, 사암, 회암등 3종이 있는데 화강암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상부에는 비교적 사암을 많이 사용하였고, 하부 계단은 회암들을 섞어 사용함. 계단석 석재는 대개 가공을 거쳤는데 남단 하부의 몇 단은 가장 정교하고 세심하며, 그 밖은 표면을 다듬어 정제하였음. 장대석 사이의 틈은 깨진 잔돌로 메웠음. 석재의 규격은 일반적으로 길이 2.7-1.5m, 높이 1-0.6m 사이인데 가장 작은 장대석은 길이 1m, 높이 0.5m임. 북측 석재는 비교적 작고, 대다수 길이 0.8-0.5m, 높이 0.4-0.2m이며 가공 또한 상대적으로 거친 편임. 남측 모서리부의 석재는 가장 크며, 방형에 가까우며, 가장 커다란 모서리 돌은 길이 4m, 높이 1.6m임. 서측 중앙 부분의 장대석은 길이 3.3m, 높이 1.5m이며, 표면은 조금 다듬어졌으며, 중앙부의 아래에 치우친 곳에는 예서체의 “大吉”이란 두 글자가 음각되어 있음.


묘장의 석축은 짜임새가 있어 가장 하중을 받는 남측 두 모서리와 측면 중앙부에서 모두 비교적 많은 커다란 장대석이 사용되었으며, 계단은 아래에서 위로 등간격으로 안으로 들여쌓아서 외관이 보기 좋은 것은 물론 내부의 깨진 돌의 측압력으로 인한 계단석의 외장을 방지하여 무덤을 더욱 견고히 함. 무덤은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남북의 높이 차이가 비교적 커서 남에서 북으로 점차 평평해지는 방법을 채용함. 비탈 아래에 놓인 제1·2단 계단의 석축는 모두 북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제3단 계단에 이르러 모든 계단이 비로소 연결됨. 축조법상, 남측에는 커다란 석재가 많이 이용되고 북부에는 작은 돌이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고도 산세를 이용하여 층을 줄이는 방법을 취함. 보존이 가장 좋은 동남 모서리는 장대석이 8층 축조되어 높이가 5.3m이지만, 동북 모서리에서 23m 떨어진 곳의 계단석은 이미 3층까지 감해져 있음. 서측 제3단 계단의 북단은 한 층만 있고 남부는 오히려 두 층이 축조되어, 내내 계단 표면이 대체적으로 평평함을 유지함.


서대묘는 두께 약 1.5m의 황색 점토층 위에 축조되었는데 풍화암층과의 틈에는 돌알갱이를 포함한 아점토가 있음. 계단 바닥층의 장대석 아랫면에는 대개 깊이 0.2-0.4m의 홈이 파여져 바닥층 석재를 고정시키고, 그 위를 두께가 다른 석재를 놓아 상면은 평평하고 가지런하게 한 후에 다시 장대석을 한 층 더 쌓았음. 동남 모서리의 제1층 계단석 아래에 높이가 1.2m에 달하는 장대석을 하나 괴었는데 가공 정도가 계단석에 비해 매우 거칠어 고분의 기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유사한 정황이 서측 중앙부분과 동측 남단에서 보이는데 장대석의 크기는 각기 다름. 동측 남단의 장대석은 높이 0.6m의 기초석으로, 이 기초석은 일반적으로 두 개의 장대석이 만나는 그 틈 사이에 사용되며, 상층 장대석이 받은 거대한 압력을 분담함. 이 고분이 붕괴되지 않는 이유는 석재의 석질과 밀접한 관계를 갖지만 기초 홈과 기초석의 작용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함.


서대묘의 계단은 보존이 양호하지 못한데 일찍이 존재한 계단 동북 모서리에는 11단이 보이고, 그 밖에 동남 모서리에는 4단이, 서북 모서리에 5단이, 서남 모서리에 4단이 보임. 계단은 층층히 안으로 들여쌓았는데 두 계단의 사이에는 깬 돌과과 강자갈을 쌓아 덮었으며, 위의 1단 계단의 상면 가장자리 모서리가 노출됨. 서대묘의 현존 계단은 14단이며, 그 하부의 계단은 남측의 양 모서리부가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고 상부 계단은 동북 모서리가 가장 분명함.


제1단 계단의 남부는 높이 5.3m이며 모두 8층이 축조되었는데 북쪽으로 가면서 층수와 높이가 점차 감소함. 석재는 크기가 다르며, 대부분 화강암이고 그 다음으로 사암과 회암을 사용함. 가장 큰 모서리돌은 길이 4m, 높이 1.6m임. 석재의 가공은 모서리부가 가장 정교하고 세밀하며, 그 나머지 부분은 대다수 표면과 양 측면만을 다듬었음.


제2단 계단은 높이 1.5m이며 지금 3-5층이 남아 있음. 석재는 대다수 화강암이고, 그 다음으로 응회암이 보임. 석재의 가공은 정교하고 세밀함.


남단의 석재는 대다수 길이 1.3-1.7m이며 높이 0.5-0.3m이며, 가장 큰 것이 길이 1.5m, 높이 0.6m임. 중간 부분의 북쪽으로 석재는 길이 0.5-1m이며 가공이 거칠며 대개 입면만을 약간 다듬은 정도임. 제1계단과 서로 비교하면, 제2단 계단은 안으로 1.2m 들여쌓았고 계단 외에는 직경 8-9㎝ 크기의 강자갈로 덮어 쌓음.


제3단 계단의 남측은 높이 0.6m이며 2층으로 축조되었으며, 제2단 계단에 비교해 1.3m 안으로 들여쌓았음. 북측에는 1층만 놓여 있는데 높이 0.3m임. 제3단의 계단은 북변에서는 제1층에 해당되는데 장대석은 모두 평평하게 고른 뒤에 지면 위에 놓았으며, 지면에 홈을 판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모서리부 2층이 축조됨. 석재는 높이 0.2-0.3m, 길이 0.6m이며 화강암이 다수를 차지함. 남측 석재는 일반적으로 가공하여 가지런한 장대석이며, 북측 석재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작고 가공 역시 거친 편이며, 밖은 돌로 덮음. 묘장 북측의 이 계단의 표면에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고르고 표면이 평평하고 가지런한 강자갈을 한겹 깔음. 자갈층 상면에는 제3단 계단이 단단히 놓여 있으며 가지런한 녹색의 회암 석판 1층이 질서있게 세워져 있는데 돌의 위쪽 가장자리는 제4단 계단보다 많이 높으며, 아래는 강자갈이 덮여 있음. 석판의 높이 0.9-1.3m, 너비 0.4-0.7m, 두께 약 0.06-0.1m이며, 가공이 아주 세밀하지는 않음.


제4단 계단 이상은 기본적으로 정리되지 못하였으며, 봉석은 여전함.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동북과 서북 모서리부의 노출상황을 보면 대체로 제3단 계단에 비해 0.8m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2층으로 축조되어 높이는 0.5m 정도임. 계단석은 화강암과 석회암을 사용하였는데 석재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길이 0.4-0.3m, 높이 0.3-0.2m임.


제5단 계단은 현재 북측에서만 보임. 제4단 계단과 비교하면 0.6m 안으로 들여쌓았음. 계단은 화강암과 석회암을 사용해 축조하였으며, 석재는 비교적 작고 가공도 거칠음. 동북 모서리의 가장 큰 석재가 길이 0.7m, 높이 0.3m이며 그 위에 돌을 덮어 봉함.


제6단 계단은 0.5m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표면은 동측 북부의 계단 일부가 보일 수 있으나 대다수 봉석에 묻힘. 석재는 화강암과 석회암을 사용했으며, 2-3층으로 축조되었는데 보통 다듬어진 상태임. 가장 큰 석재는 동북 모서리돌인데 길이 0.6m, 높이 0.4m이며 그 나머지 석재는 길이 0.4-0.3m, 높이 0.3-0.2m로 고르지 않음. 두 단 사이에는 역시 자갈과 강자갈이 덮여 있음.


제7단 계단은 다시 0.6m 안으로 들여쌓았음. 계단석은 간단히 가공하였으며, 석재는 화강암을 사용함. 계단 높이는 0.4m, 사용된 석재는 길이 0.2-0.4m, 너비 0.2m의 작은 돌임. 두 단 사이에는 자갈과 강자갈로 덮여 있음.

제8단~제14단 계단은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안으로 들여쌓았는데 모두 0.4m 정도임. 정리한 상황을 보면 축조법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석재 또한 비교적 통일적으로 전부 길이 0.3m, 높이 0.2-0.3m의 화강암과 석회암을 사용하여 2-3층으로 축조하였는데 계단 높이는 약 0.6m. 마지막에 자갈과 강자갈로 덮여 있음.


제14단 계단 이상은 사면이 모두 보이지 않으며, 무덤 상부는 평탄하여 이 위에 묘실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도굴에 의해 현재 묘 정상부에는 깊은 구덩이가 형성되었고 묘실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아 축조방식은 알 수 없음. 도굴 구덩이의 안팎에서 가공이 비교적 잘된 방형의 석재가 보이지 않고 천정막음돌 및 자갈돌도 보이지 않음. 도굴로 인한 남쪽의 돌무지 중에 묻혔을 가능성도 없으므로 묘실은 잘 쌓은 석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연한 광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제6단 계단 이상부터 묘장의 표면에는 깨진 기와편이 매우 많아서 묘상 건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됨.


2003년 서대묘 정리작업중에 토기, 청동기, 철기 5건, 석기, 금동기 12건 등 유물 38건이 출토됨. 대부분 고분 아래의 흘러 내린 돌무지에서 나왔고, 어떤 것은 묘상의 계단에서 나옴. 이외에 묘상과 묘하에서 대량의 수키와와 암키와가 채집됨. 철기류는 대다수 묘장 아래의 돌에서 출토되었고, 공구와 마구가 있음. 서대묘에서 비교적 기와가 많이 출토됨. 묘하와 묘상의 약 절반면적에서 채집한 기와를 정리하였는데 가지런하게 쌓아둔 것이 대략 9m³ 정도임. 채집·정리한 기와에서 암키와의 수량이 다수를 차지하고, 수키와는 대략 1/5 보다 조금 더 점유하며, 와당이 소량 발견됨. 채집·정리한 기와 중에 수키와와 암키와는 두꺼운 것과 얇은 것 등 두 종류가 모두 있으며, 와당은 모두 8등분의 권운문 원형 도안임. 암키와는 대다수 무문이고, 일부 유승문과 지압문이 있음. 이들 기와는 통계상 무문의 얇은 암키와(素面薄板瓦)가 40% 정도를, 수키와는 대략 12%를, 무문의 두꺼운 암키와는 대략 22%를, 두꺼운 수키와는 약 10%를, 거친 승문 암키와는 대략 8%를, 정교한 승문 암키와는 약 5%를, 지압문 처마기와(첨두와)는 약 3%를 차지함. 기와가 덮여진 면적을 추산하기위해 최대 밀도로 가지런하게 배열하였는데 면적은 대략 100㎡로 환산됨. 묘상에 아직 채집하지 않은 구역에는 손상된 기와(잔와)가 드물게 분포해 있는데 총량은 분구 정상부를 모두 덮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함. 암키와는 무문이 비교적 많고 승문이 새겨진 암키와 압인문이 새겨진 처마기와는 비교적 매우 적음. 수키와는 모두 무문이며 형체는 두께가 다름. 어깨부의 형태에 의해 구분되는데 평견으로 견설(肩舌)이 연접하는 곳이 직각을 이루는 형태, 평견으로 견설이 연접하는 곳이 원각을 이루는 형태, 어깨가 위로 들렸으며(翹肩) 견설이 연접하는 곳이 원각을 이루는 형태 등임. 와당은 11건으로 모두 니질회도로서 모제. 절대다수는 8등분의 얕게 부조(천부조)한 권운문도안이며, 원형이며 주연이 돌출하지 안했으며, 직경 14-14.5㎝임. 그 가운데 비교적 온전한 2건을 보면, 와당 중앙이 원형돌기이며 그 밖의 도안은 8분 구획된 권운문임. 외측에는 안쪽을 향하는 연호가 있음. 8개 연호선 안에는 양각의 예서체 문자가 새겨 있으며, 어떤 것은 획이 결여되어 있는 듯함. 문자는 간지 기년이 있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삼각 거치문이 새겨져 있음. 그 외 연화문 와당 잔편이 1건 있음. 문자와는 4건으로, 소성 전에 기와의 내면 혹은 배면에 반듯하게 글씨를 새겼음.



역사적 의미

 

서대묘는 대형계단석실묘로서, 고분이 자리한 위치와 묘장 형식이나 규모, 출토 기물 등 여러 요소에 의해 판단해볼 때 왕릉급 고분으로 짐작됨. 묘장 형식상, 서대묘는 계단적석묘의 형성 단계에 속하나 발전된 형태는 아님. 인근의 천추묘보다 이르며, 동일한 발전 단계의 칠성산0211호묘보다 늦음. 중국학계에서는 『洞溝古墓群 -1997年調査測繪報告』에서는 서대묘를 서천왕릉으로 비정하였으나, 현재는 당대 도굴당하였던 미천왕릉으로 추정함. 문헌에는 고구려왕릉의 도굴이 두차례 확인됨.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296년 서천왕릉과 342년 미천왕릉의 훼손 사례가 전하고 있으며, 『魏書』 고구려전에는 342년 미천왕릉 훼손사건이 기록되어 있음. 서대묘에서 발견된 와당 중에는 “己丑”이란 문자가 있음. 만일 이 글자 해독과 간지기년이 오류가 없다면 앞서 문헌과 연계해볼 때 342년의 미천왕릉 훼손사건과 가장 관련성이 큼. 서천왕 재위중에는 “己丑”年이 없으며, 296년에서 342년 사이의 기축년은 329년으로 확인되는데 이해가 미천왕 32년이고 2년 후에 미천왕이 죽음. 고구려에는 미리 ‘송종지의(送終之衣)’를 마련하는 풍속이 있다는 점에서 미천왕이 재위시기의 기축년에 자신이 능묘를 수축하고 기와를 만들었다고 추정 가능함. 서대묘의 형식과 문물의 특징 등은 이 연대와 대체로 일치함. 2004년 집안지역의 초대형 적석묘들의 발굴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이들 대형 적석묘를 고분 구조와 입지에 따라 고분의 축조 순서를 추정한 결과와 서대묘에서 출토된 ‘기축명 와당’이 329년으로 비정됨으로써 서대묘를 미천왕릉으로 보는 데에는 중국 학계나 한국, 일본 학계에서 별 이견이 없음.


서대묘는 고구려 시기에 훼손되었음. 도굴 당시 전통적 의미의 묘실은 물론 묘실 바닥의 모종의 특수 유적에까지 화가 미쳤는데, 이 특수 유적은 오랜 동안 사람들이 의심하던 하층의 묘실임. 이에 대해서는 하층 묘실로 보기도 하고, 요갱으로 보기도 함.


고구려 왕릉은 이중으로 매장하는 특수구조인데 여러 현상이 증명할 수 있음. 집안에 현존하는 대형 적석묘중에서 바닥까지 도굴된 묘장이 여러 기가 있는데 칠성산 211호묘, 칠성산 871호묘, 마선구 90호묘 등임. 따라서 이런 구조적 특징을 모르는 후대인들이 1,000m³ 석재를 옮겨 도굴하는 행위는 거의 불가함. 구 『輯安縣志』의 기록에는, 장군총 묘실의 동북 모서리에는 빈 구멍이 있었는데 향민이 그 안에 돌을 던지면 소리가 오래되어서야 그쳤다고 함. 이런 현상은 1970대까지 확인할 수 있었음. 2003년 태왕릉 역시 묘실 외에 또 다른 석광이 발견되었고, 묘실 아래에는 또 다른 도굴 구멍이 있었는데, 고구려 묘장은 상·하 양층의 매장 장소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님. 2003년 서대묘의 발굴 작업과 동시에, 그 동쪽 400m 정도에 위치하며 근대에 훼손된 마선구 610호묘의 기초를 정리하였음. 탐색 구덩이를 파고 해부를 통해서, 지면에는 타원형의 토갱이 하나 있으며 주변은 땅을 다졌던 것을 확인함. 그 해 토갱속에서 100kg 정도의 동전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연대가 가장 늦은 것이 왕망 시기의 ‘화천’임. 이런 현상은 “요갱” 성질의 유적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이는 퇴장유적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임.


 

자연환경

 

서대묘는, 통구 고분군 마선구 고분군의 서단, 마선향 건강촌 5조의 북측 언덕에 위치. 고분은 북으로 안자령에 기대어 있으며 남쪽으로 압록강과 약 500m, 동으로 집안시구와 약 5.5㎞ 떨어져 있음. 고분이 자리한 곳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산지의 완만한 비탈지로, 무덤의 높이 차이는 비교적 큼. 고분의 북쪽은 비탈 위로 해발 211.49m이며, 남쪽은 비탈 아래로 해발고도 201.45m임.

집안-단동 간의 도로가 무덤과 압록강 사이를 동서로 통과함. 언덕 가장자리를 따라 동북으로 약 1㎞에는 마선0626호묘가 있으며, 동쪽 약 2㎞ 되는 곳의 도로 남쪽에는 천추묘가 자리하고 있음.


 

유물정보


管飾 1점, 泡飾 7점 外 金銅器類 3점. 鐵鐝 1점, 馬銜 1점 外 鐵器類 3점. 己丑名瓦當 外 瓦類. 陶口沿 1점 外 土器類 2점. 石鎬 1점.


 

참고문헌


· 關野貞, 「關野貞博士一行の朝鮮古墳調査」『考古學雜誌』 4-3, 日本考古學會, 1913

· 關野貞,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一·二)」『考古學雜誌』 5-3·4, 日本考古學會, 1914

· 關野貞, 「滿洲國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1941

· 三宅俊成, 「安東省輯安縣城附近高句麗の遺跡」『滿蒙』 16-9, 不二出版, 1935

· 三宅俊成, 「輯安縣城附近の高句麗の遺蹟と遺物」『東北アジア考古學の硏究』, 國書刊行會, 1975

· 藤田亮策, 「滿洲國安東省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遺蹟の調查」『靑丘學叢』 23, 1936

· 池內宏, 「滿洲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の遺跡」『考古學雜誌』 26-6, 日本考古學會, 1936

· 藤田亮策, 「滿洲に於ける高句麗遺跡」『朝鮮』 272, 1938

· 池內宏, 「滿洲國安東省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の遺跡」『考古學雜誌』 28-3, 日本考古學會, 1938

· 三上次男, 「輯安行 - 高句麗時代の遺跡調査」『歷史地理』 71-1, 日本歷史地理硏究會,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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