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1/h2009111522241386330.htm

[김태준의 문향] <9> 발해 사신이 일본에 남긴 시편들
동국대 명예교수


발해(渤海)는 나당(羅唐) 연합군에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이 대조영(大祚榮)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이면서, 후기 신라가 북국(北國)으로 불렀던 '남북국 시대'의 우리 역사이다. 

고구려 멸망 30년 뒤인 698년에 그 옛 땅에 세운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따라 '천손(天孫)'이라 했고, 일본은 발해를 '고려'로, 발해로 보내는 사신을 '고려사(高麗使)'라고 했다. 당나라로부터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릴 만큼 흥성한 나라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발해는 역사와 문학 유산이 적다.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고서(渤海考序)>에서 '<발해사>와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나라를 이어받은 고려가 이를 펴내지 않았다'며 한탄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발해는 당나라에 160차례 이상 사신을 보냈으며 일본과는 47차례 사신을 교환했는데,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23편을 비롯하여 발해 사신의 시 11수가 대부분 일본 문적에 남아 전한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송기호 <발해를 다시 본다>).

이 가운데 758년 발해 사절의 부사(副使)였던 양태사(楊泰師)의 시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夜聽檮衣聲)'는 헤이안(平安)시대 초 칙찬삼집(勅撰三集)의 하나인 <경국집(經國集)>(827)에 올랐다. 칙찬삼집은 당시 인기를 끌었던 <릉운집(凌雲集)>(815)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818) 등 3대 한시집을 말한다. 그는 무인(武人)이면서 시인이다.

특히 제17차 발해 대사가 된 왕효렴(王孝廉)의 시 5수와 녹사(錄事) 석인정(釋仁貞)의 시 1수를 포함해 발해 관련 12수가 <문화수려집>에 실렸다. 발해 사절이 일본 한시 문화에 끼친 자극은 칙찬삼집이 출간된 데서 가장 뚜렷이 들어났다. 왕효렴이 읊은 '봄날에 비를 보고(春日對雨 探得情字)'란 시는 그 가운데 한 편이다.

'주인이 변청(邊廳)에서 잔치를 베푸니/손님은 제 나라 서울(上京)에서처럼 몹시 취하였네/생각컨대 우사(雨師)도 성의(聖意)를 안듯/단비가 촉촉이 내려 나그네 마음 적시네.'

발해의 서울 상경(上京)을 떠난 사신은 지금의 중국 훈춘 땅인 동경(東京) 항에서 배에 올라 겨울바람을 안고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의 노도(能登) 반도의 발해 객원(客院)에 닿았다. 

구사일생으로 바닷길로 만리타국에 이른 날, 이른 봄비를 만난 시인의 마음이 적셔온다. 그러나 왕효렴은 일본에 머물며 당나라 장안에서부터 친했던 일본 진언종의 개조 홍법대사 공해(空海ㆍ774~835)와 가까이 사귀며 가을까지 5수 시를 남겼다. 

그러나 사신 일행이 불행히도 일본에서 객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이 슬픔을 쓴 공해의 여러 편의 글까지 칙찬 한시집에 남아, 9세기 초의 발해문학의 영향은 일본문학사를 크게 빛냈다(고니시진이치(小西甚一) <일본문예사> 2권, 하토오카아키라(破戶岡旭) <스가와라미치자네(菅原道眞)> 중 '발해국의 문학' 부분)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