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nodistortion/50157920048
고구려 기획 - 고구려의 건국
고구려 기획 - 고구려의 건국
* 과거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성왕이고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왕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밑에 보충하겠습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지정한 만큼이나 고구려 시조를 추모왕이라 정의하고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에 있는 동명왕릉 (북한 학계의 의견은 알 수 없지만 현재 왕릉의 이름은 동명왕릉이다)
주몽신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에 관한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몽신화 입니다. 주몽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의 생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릅니다. 그래서 주몽이 결혼할 수 있는 나이 때와 건국할 수 있는 나이 때를 고려하여 '삼국사기' 기록을 채택하였습니다.
부여의 금와왕은 사냥을 하다 우연히 태백산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금와는 궁금하여 울고 있는 여인에게 정체를 묻습니다. 여인이 답하기를 "저는 화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 입니다. 어느 날, 오누이들과 함께 나와 놀다가 그만 하늘의 아들 해모수와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희는 어머니의 허락만 받고 결혼을 하였고 이에 화백께서는 진노하시여 이 곳 우발수에 귀양을 보내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금와왕은 유화를 구해 주어 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유화는 햇빛에 의해 비춰지더니 잉태를 하였고 유화는 알을 낳게 됩니다. 금와왕은 상서롭지 못하다며 알을 내다 버렸지만 새들이 알을 보호하고 개와 돼지들이 알을 피하는 것을 보고 다시 유화에게 돌려보내줍니다. 유화는 그 알을 잘 보살펴 주었고 얼마 후,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습니다. 사내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남들보다 활 쏘는 재능이 뛰어나 사람들은 그를 주몽이라 불렀습니다. 이 외에 고주몽, 추모, 상해, 도모라는 이름이 있었답니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소왕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은 주몽의 능력과 재능을 시기하여 온갖 계략을 꾸며 주몽을 괴롭혀 왔습니다. 여기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금와왕의 총애를 받는 주몽을 시기한 왕자들은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사냥대회를 준비합니다. 유화는 말 혓바닥에 침을 놓아 말을 야위게 만듭니다. 금와는 마굿간을 돌며 주몽은 활솜씨가 매우 훌륭하니 저 홀쭉한 말을 타도 잘할거야 라며 사냥대회에 야윈 말을 타게 합니다. 말이 야위운 가운데에서도 왕자들은 주몽의 사냥실력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면 금와의 아들들이 주몽을 얼마나 시기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청년이 된 주몽은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는 인물이 됩니다. 이에 왕자들은 왕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를 죽이려 마음 먹습니다. 이 사실을 안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멀리 달아날 것을 일렀습니다. 주몽은 떠나기 전날 밤, 임신 중이었던 예씨부인에게 징표인 반쪽 칼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 징표를 가지고 찾아오시요' 라는 말을 남기며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세명의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였습니다.
주몽 일행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졸본부여 왕은 주몽을 보게 되었습니다. 졸본부여 왕은 주몽이 믿음직스럽고 덕이 있어보여 자신의 사윗감으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주몽도 토착세력이 아닌 유이민이 었기 때문에 자신의 지지층을 만들기 위해서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됩니다. 졸본부여의 둘째 딸과 혼인하는데 이가 바로 소서노 입니다. 주몽은 졸본부여 왕의 신임과 그 곳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기원전 37년 졸본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에 오르게 됩니다. 주몽은 자신의 성을 고씨로 바꾸고 국호 또한 고구려로 바꾸게 됩니다. 이 때 주몽의 나이는 22세 입니다.
기원전 36년 주몽은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자, 비류국 상류에 한 무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 중 우두머리가 말하길 "나는 비류국의 송양왕이오 좁은 곳에 두 명의 왕이 있어서야 되겠소? 나는 여러 대째 여기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내 밑으로 들어오시오" 그러자 주몽은 "나는 해모수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요 내가 어찌 그대 밑에 있을 수 있겠소?" 마침내 이들은 100걸음 떨어진 곳에 사슴 그림을 그려 놓고 활로 배꼽을 쏘아 맞추는 내기를 했는데, 주몽이 맞추었습니다. 그 활 솜씨에 놀란 송양왕은 주몽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기원전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기원전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습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영토를의 넓혀 나갈 무렵, 동부여의 예씨부인은 아들 유리를 낳았습니다. 유리는 아버지가 없다는 오명을 쓰자 어머니 예씨부인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유리는 증표가 있어야 아버지를 볼 수 있음을 듣고는 증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씨부인은 "일곱 모가 진 돌위의 소나무 밑에 있다" 라고 일러주었지만 찾기는 쉬어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리는 여러 달이 지났지만 이 증표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리는 주춧돌을 발견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일곱 모가 진 돌은 주춧돌이었던 것 입니다. 증표를 찾은 유리는 반쪽 칼을 들고 예씨부인과 함께 주몽을 찾아갑니다.
기원전 19년 주몽은 유리를 태자 자리에 앉입니다.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의 왕위계승권이 보장되지 않자 비류와 온조 일행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웁니다. 후일 그 나라가 백제 입니다.
주몽은 이를 말렸지만 소서노는 떠났고 주몽은 그 해 9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나이는 40세 였습니다.
주몽의 묘 -북한 평양에 위치해 있다.
건국의 신성화 작업
건국신화들을 보면 나라를 세운 건국자들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알에서 태어난 인물은 주몽을 비롯해서 박혁거세, 석탈해, 김수로 등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신화가 나라를 건국한 세력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한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한 뒤, 그 주변 지역은 한의 영향력 아래 놓이거나 작은 나라들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여, 고구려 등 몇몇 세력은 고조선 보다 휠씬 강력한 권력 기구와 지배 체제를 갖춘 국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영웅적 능력을 가진 왕이 필요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건국을 신성시하기 위해, 자신이 하늘신과 물신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주몽이 하늘신과 물신을 아버지, 어머니로 선택한 것은 이 두 가지가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백성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서 주몽은,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고, 물의 신의 손자임을 내세우게 된 것 입니다. 이처럼 알에서 태어난 탄생 신화는 신라의 건국 신화와 가야의 수로왕 신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이들의 신화도 건국 시조가 하늘의 뜻에 다른 출생임을 상징함으로써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명성왕은 부여의 시조, 추모왕은 고구려의 시조
여태까지 학계는 고구려의 시조가 동명왕으로 알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시조가 추모왕이라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추모왕이 고구려의 시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서와 유적이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릉비와 모두루묘지에는 동명성왕이 아닌 추모왕이라 기록이 되있습니다. 고구려의 시조와 부여의 시조가 동일인으로 착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건국 신화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각 건국신화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0년 경에 쓰여진 후한 시대 왕충의 '논형 <길험편>'에는 동명성왕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쪽 이민족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 시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은 진노해 시종을 죽이려 하였다. 시종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 답하였다. 후일 아이를 낳아 왕은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으로 옮겨 놓고는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신기해 하며 아이가 하늘 신의 자식일 것이라 믿고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의 활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에 부여국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후한서'의 부여국 기록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색리국(索離國) 왕이 출타했을 때 그의 시녀가 임신하자 죽이려다가 계란만한 기(氣)가 들어와 임신했다 하여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 우리, 마굿간에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보호해 죽지 않자 어머니에게 주어 기르도록 하니 이가 바로 동명(東明)이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자 왕이 그 용맹함을 꺼리어 죽이려 하자 남쪽으로 도망하는데 고기와 자라들이 엄체수를 건너게 도와주어 무사히 건넌 후 부여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이를 보면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매우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고구려 건국 신화 입니다.
'
부여의 금와왕은 사냥을 하다 우연히 태백산 근처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금와는 궁금하여 울고 있는 여인에게 정체를 묻습니다. 여인이 답하기를 "저는 화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 입니다. 어느 날, 오누이들과 함께 나와 놀다가 그만 하늘의 아들 해모수와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희는 어머니의 허락만 받고 결혼을 하였고 이에 화백께서는 진노하시어 이 곳 우발수에 귀양을 보내었습니다." 이 사연을 듣고 금와왕은 유화를 구해 주어 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유화는 햇빛에 의해 비춰지더니 잉태를 하였고 유화는 알을 낳게 됩니다. 금와왕은 상서롭지 못하다며 알을 내다 버렸지만 새들이 알을 보호하고 개와 돼지들이 알을 피하는 것을 보고 다시 유화에게 돌려보내줍니다. 유화는 그 알을 잘 보살펴 주었고 얼마 후.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습니다. 사내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남들보다 활 쏘는 재능이 뛰어나 사람들은 그를 주몽이라 불렀습니다. 이 외에 고주몽, 추모, 상해, 도모라는 이름이 있었답니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소왕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들은 주몽의 능력과 재능을 시기하여 온갖 계략을 꾸며 주몽을 괴롭혀 왔습니다. 여기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금와왕의 총애를 받는 주몽을 시기한 왕자들은 그를 골탕먹이기 위해 사냥대회를 준비합니다. 유화는 말 혓바닥에 침을 놓아 말을 야위게 만듭니다. 금와는 마굿간을 돌며 주몽은 활솜씨가 매우 훌륭하니 저 홀쭉한 말을 타다 잘하게 될거야 라며 사냥대회에 야윈 말을 타게 합니다. 말이 야위운 가운데에서도 왕자들은 주몽의 사냥실력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면 금와의 아들들이 주몽을 얼마나 시기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청년이 된 주몽은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는 인물이 됩니다. 이에 왕자들은 왕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를 죽이려 마음 먹습니다. 이 사실을 안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멀리 달아날 것을 일렀습니다. 주몽은 떠나기 전날 밤, 임신 중이었던 예씨부인에게 징표인 반쪽 칼을 주며 '아들을 낳거든 이 징표를 가지고 찾아오시요' 라는 말을 남기며 오이, 마리, 협보 등의 세명의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향하였습니다. 주몽 일행은 그 곳에서 나라를 세우는데 이는 후일 고구려가 됩니다'
구분 | 동명왕 설화 | 추모왕 설화 |
출생지 | 탁리국 고리국 | 부여국 |
낳아준 인물 | 탁리국왕의 시종 | 유화부인 |
잉태경위 | 하늘에서 내려온 달갈 같은 기운 | 유화부인을 비춘 햇빛 |
출생상황 | 일반아이와 같은 태생 | 알을 낳음 |
시기상대 | 탁리국왕 | 부여의 일곱 왕자 |
도망간 방향 | 남쪽으로 도망 | 동남으로 도망 |
건넌강 | 엄체수, 시엄수, 엄수, 엄표수 | 보술수, 엄체수, 엄호수, 엄리대수 |
건국한 국가 | 부여 | 고구려 |
기록된 책 | 논형, 위략, 수신기, 양서, 수서, 북사, 범원주림 등 | 광개토대왕비문, 삼국사기, 위서, 동명왕편, 삼국유사, 주서편통전 등 |
상호 공통점 | 짐승의 보호를 받음, 활을 잘 쏘고 말을 기름 | 자라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같음 |
김부식 '삼국사기'는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표기 했는데 이는 김부식이 이 설화들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도 마찬가지죠. 중국의 사서와 연남산의 묘비에서는 동명왕과 추모왕의 구분이 되어있다고 하니고구려의 시조와 부여의 시조는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 시조는 동명성왕으로 불리우게 되었을까? 학계에서는 고구려인들이 고의적으로 시조를 둔갑했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입니다. 추모와 동명의 일대기가 매우 비슷하였고 과거부터 존경받던 영웅, 동명왕을 고주몽과 동일시 시켜 자신들의 시조의 권위를 높인다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백제가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는가?' 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백제 기획편에서 자세히 기고하겠습니다.
*고대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 공유와 교류를 위해 여러 자료를 인용하였고 많은 자료를 참고했음을 알립니다. 출처는 하단에 밝힙니다. 만일 저작권에 문제가 있을시에는 해당부분을 삭제하겠습니다.
자료참고: (주)한국허밍웨이 '교과서에 나오는 삼국유사,삼국사기'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 -동명왕 21p 참조
네이버 지식in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성왕일까? 동명성왕일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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