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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부여 누가 더 강했을까?
[주몽 2배로 즐기기 3] 사돈 송양을 굳이 '적'으로 바꿔놔야 했나
06.09.13 15:10 l 최종 업데이트 06.09.14 10:10 l 신광재(sjs22)
▲ 나주에 설치된 드라마 세트장(철기방) ⓒ 신광재
정치인은 표가 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팔고 다니면서 지지를 호소한다. 조선시대에는 줄 한번 잘못 서면 당쟁에 휘말려 사돈은 말할 것도 없고, 팔촌까지 패가망신, 아니 목을 내놓기 일쑤였다.
지난 12일 방영된 <주몽>에서 주몽의 사돈인 송양(松讓)이 주몽에게 죽을 뻔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원수지간으로 지내다 사돈을 맺는 경우도 간혹 없는 건 아니지만, 사돈관계인 주몽과 송양의 관계를 이처럼 얽히고설키게 만든 제작진의 상상력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사돈까지 팔다 보니 드라마 전개가 역동적이며 스펙터클해 흥미를 더해가고 있지만, 해도 너무한 역사 왜곡인 것 같다.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 일명 '만주프로젝트'로 만주 일대 고대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갖가지 '꼼수'를 쓰고 있다. 이런 마당에 한국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만주 일대 역사를 이처럼 대중매체에서 재미와 흥미를 이유로 왜곡하고 있다.
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비류수 상류에 세워진 비류국(沸流國)은 지금의 만주 일대에 세워진 나라다. 지금부터 2000년 전 만주 일대에서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는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비류국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비류국왕 송양을 일개 군장으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나라와 협력해 부여를 치려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엄연히 송양은 <삼국사기>에 비류국왕으로 기록돼 있는데도 이를 왜곡, 중국 한나라와 빌붙어 부여에 맞서는 인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처럼 대중매체까지 나서 우리의 역사를 한나라의 속국처럼 매도하니 동북공정이 고개를 드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아무리 드라마 특성상 흥미와 재미가 중요하다지만, 기본적인 역사인식이 아쉬울 따름이다.
최근 동북공정으로 나라가 떠들썩하고 드라마에서 비류국왕 송양이 한나라에 복속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데, 송양과 주몽의 실제 관계를 알아보자.
주몽, 부여와 싸우지 않았다
비류수가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어느 날 비류수로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윽고 사냥길에 나선 주몽 일행은 상류로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인적이 드문 비류국에 주몽 일행이 찾아오자 비류국왕 송양이 직접 이들을 맞이했다.
"과인이 후미진 바다 귀퉁이에서 살다 보니 일찍이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뜻밖에 서로 만나니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오! 그러나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나는 천제의 아들로 모처(某處)에 와서 도읍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러 대 동안 왕이었다. 또한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렵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한가."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하냐'는 송양에 말에 화가 난 주몽은 말다툼 끝에 활로 기예를 겨루게 되었다. 결과는 뻔했다. 주몽의 실력이 월등했고 송양은 이에 대항할 수 없었다. 다음해 6월 송양은 주몽에게 항복했다.
주몽은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송양을 주인으로 봉했다. 고구려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첫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둘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주몽의 아들 유리는 왕위에 오른 뒤 송양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기원전 18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송양에 대한 기사가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사돈까지 적으로 만들어 드라마를 전개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 금와왕(드라마 제작발표회 때 모습) ⓒ 신광재
드라마 특성상 극에 흥미를 더하기 위해 곧 주몽과 대소의 전쟁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주몽과 대소 사이에 밀고 밀리는 전쟁이 없다면 드라마가 '앙꼬 없는 찐빵'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금와왕이 화살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설정도 그 둘의 전쟁을 예고하는 듯하다. 드라마 전개상 생사람을 잡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와 달랐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여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은 없었다. 주몽이 왕위에 오르고 14년이 지난 해 9월, 유화부인이 동부여에서 죽었다. 유화부인이 죽자 금와왕은 그녀를 태후의 예로 제사 지낸 다음 신묘(神廟)까지 세웠다. 그러자 주몽은 그해 10월 부여에 사신을 파견하고 방물을 보내 금와왕의 은덕에 보답했다.
이처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는 주몽이 왕위에 오른 뒤 14년이 지날 때까지 금와가 부여왕으로 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드러나듯, 이 당시 부여와 고구려는 적대적 관계라기보다는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5년 후, 왕위에 오른 지 19년이 되던 해 9월 주몽이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부여와 고구려는 단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이 시기 기록을 살펴보면 동명성왕(주몽) 6년 8월에 오이와 부분노가 태백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을, 동명성왕 10년 11월엔 북옥저를 쳐 성읍을 만든 게 고구려가 치른 전쟁의 전부다. 동명성왕 당시 고구려엔 행인국과 북옥저를 정벌할 군사력은 있었지만, 부여만큼 강하진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눌려지내던 고구려, 주몽의 손자 때 부여를 처음으로 공격
고구려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가 왕위를 이은 뒤, 부여에서도 대소가 왕이 됐다. 대소는 금와와 달랐다. 유리왕 14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볼모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유리왕은 강대한 세력을 지닌 부여의 압박에 밀려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대소가 그해 겨울 11월 5만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했으나, 폭설 때문에 성과 없이 돌아갔다.
유리왕 28년엔 부여에서 사신이 와서 유리왕을 꾸짖기까지 했다.
"우리 선왕께서 그대의 선군 동명왕과 서로 우호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유인해 이곳으로 도망오게 하며 백성들을 모아 나라를 이루려 하고 있다. 무릇 나라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겐 어른과 아이가 있는지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의요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다. 이제라도 왕이 만약 예의와 순리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국운이 길이 다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 대소 왕자(드라마 제작발표회 때 모습) ⓒ 신광재
이처럼 부여 사신이 유리왕을 꾸짖었지만 유리왕은 훗날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치욕을 참아냈다. 이러한 <삼국사기> 기사는 유리왕 때까지는 고구려보다 부여의 군사력이 강했다는 것을 전해준다.
그렇다면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바뀌었을까?
유리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대무신왕이다. 주몽의 손자인 대무신왕 4년 12월, 드디어 고구려가 처음으로 부여를 공격했다. 전쟁은 다음해 2월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부여 군사 1만여 명이 흩어지면서 전세가 고구려 쪽으로 기울었고, 고구려는 대승을 거뒀다.
그렇다면 두 나라의 관계는 언제 바뀌었을까?
유리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대무신왕이다. 주몽의 손자인 대무신왕 4년 12월, 드디어 고구려가 처음으로 부여를 공격했다. 전쟁은 다음해 2월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부여 군사 1만여 명이 흩어지면서 전세가 고구려 쪽으로 기울었고, 고구려는 대승을 거뒀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 59년 만에 고구려가 처음으로 부여를 공격해 승리를 거둔 것. 그 이전까지 고구려는 부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물론 대무신왕 이전에 부여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다. 동명성왕 때는 없었지만 유리왕 때는 전투가 벌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유리왕 32년 11월에 부여인이 쳐들어왔다. 이때 유리왕의 아들 무휼(훗날 대무신왕)은 부여군보다 군사가 적었기에 정면 승부를 피하고, 복병을 활용한 기습공격으로 부여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부여를 '선제'공격한 건 대무신왕 때가 최초다.
이후 고구려에선 광개토대왕이 대대적으로 영토를 넓혔다. 반면 부여는 3세기말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평원에 자리잡고 있는 부여는 지형적으로 외침을 방어하는 데 불리했으며, 삼림민·유목민·농경민이 교차하는 중간지대였기에 주변의 세력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영향 받았다. 결국 부여는 5세기 말 물길(勿吉)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 내지로 옮겨왔고, 494년(문자왕 3년)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덧붙이는 글 | '주몽 2배로 즐기기'는 5편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들어가는 순서>
1. 주몽의 첫 여자가 소서노인가?
2. 여자 잘 만나 고구려 세운 주몽
3. 고구려와 부여 누가 더 강했을까?
4. 주몽은 대소에게 복수했을까?
5.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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