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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무용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대륙과 인접하게 위치한 관계로 가장 일찍이 대륙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주체적인 역량과 자율성을 지닌 왕권국가로 발전시킨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였다. 고구려가 광활한 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는 용맹과 슬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매사에 섬세하고 주도면밀하여 어느 것 하나 기교를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궁실의 건축, 병기 등 여러 분야에 그 재질을 나타냈다. 

특히 불교를 수용함으로써 초부족적인 부족국가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국가조직과 관료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불교의 도입으로 불교예술이 일어나고 중국 등의 외래문화를 수입하여 고구려의 독특한 예술형태를 구축하였다. 

고구려의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수렵총 등에서 발견된 벽화에서 선의 묘사나 색채의 조화는 생동감과 박력을 느끼게 하고 말을 탄 무사의 모습은 용맹스러운 고구려인의 패기에 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무용총과 동수묘에서보이는 무용하는 모습과 관현악을 연주하는 그림으로 보아 전문 무용가와 음악인이 독립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춤의 내용 

고구려는 제천의식으로 10월에는 천신에 대한 감사와 기원의 추수감사제로 전 국민적 거룩한 행사인 동맹이 있었다. 이밖에도 성신과 사직신에게 각각 제사를 지냈다. 동맹을 비롯하여 여러 신들에 대한 국가의 제사에는 반드시 음악과 무용이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9년 안악군에서 발굴된 제3호 분묘, 동수묘 벽화를 살펴보면 주인공이 수레를 중심으로 취타악대와 말을 탄 관원들과 장기수, 검무를 추는 자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중의 행렬 중에서 의식 무용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분의 후실 벽화를 보면 가야금과 같은 악기와 긴 퉁소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다리를 꼬면서 춤추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부터 왕실에서는 서역의 문화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밖의 문헌에 의하면 지서무, 호선무 및 고려무가 당나라의 궁정에서도 연희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거기에서 한 사람의 남자 무용수가 느린 음악에 맞추어 넓은 소매를 휘날리면서 춤추는 모습이 마치 큰 새가 하늘을 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호선무는 한 무녀가 커다란 공 위에 올라서서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뛰고 돌고 하는 것이 순수한 무용이라기보다 묘기에 가까운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당시 고구려 무용의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질적, 양적으로 세련되고 동작에 있어서도 풍부한 표현으로 독무로부터 2인무, 3인무, 7인무 등 많은 춤 종류가 있었고 춤사위가 합리적으로 체계가 잡혀 머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가서 연희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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