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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전통춤 - 삼국시대"에서 고구려 부분만 가져와 제목은 그에 따라 달았습니다.
고구려의 전통춤
* "한국의 전통춤 - 삼국시대"에서 고구려 부분만 가져와 제목은 그에 따라 달았습니다.
고구려의 전통춤
고구려는 백제, 신라보다 대륙과 인접한 탓에 일찍부터 중국과 문화를 주고 받았으며, 사람들이 용맹하여 국력이 자못 강대하였다. 이는 덕망과 지혜를 겸비한데다가 사예(射藝)로 용맹과 무략이 빼어난 영주 동명성왕의 탁월한 영도와 오랜 동안 한족의 압제 때문에 적개심에 찬 군중이 일치단결하여 고조선의 위세를 찾자는데 발분하였기 때문이었다.
4세기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남하 정책을 펴서 수도를 통구에서 평양으로 옮기고(427), 만주에 요하 이동(以東)과 한반도 경상 · 전라 · 충남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점유한 대국이 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여러 선진 문화와 접촉이 많았다. 낙랑 문화를 비롯한 중국계, 인도계, 북방계 문화를 받아들여 남쪽으로 전파하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소수림왕 2년(372)에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동방 불교의 시초를 열었다. 또한 유학, 천문, 의학 등도 받아들여 귀족 자제의 교육을 위한 태학도 세우고 율령도 반포하였다.
고구려 고분인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수렵총 등에서 발견된 벽화는 선의 묘사와 색채의 조화가 생동하는 박력을 느끼게 하고 말을 달리는 무사의 모습은 기마 민족다운 고구려인의 웅건하고 패기에 찬 실물을 보는 듯하다. 또 무용총의 벽화에서는 전문 무용가와 음악인이 독립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제천 의식으로 10월에 거행되던 동맹은 천신에 대한 감사와 기원의 추수 감사제로서 또한 전 국민이 추앙해 받드는 조상신인 수신(隧神)을 함께 모시는 거룩한 행사였다.
이 밖에도 고구려에서는 성신(星神)과 사직신(社稷神)에게 각각 제사를 지냈다.
동맹을 비롯한 이와 같은 제신에 대한 국가의 강대한 제사에는 존엄한 음악과 신비로운 무용이 그 중추가 되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그 내용과 형태가 과연 어떠하였을까가 문제인데,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용맹한 기질로 미루어 매우 직선적이요 동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14에 의하면 고구려는 1세기 초기에 중국과 접촉을 하였다. 서역과의 교통이 열리고 문물이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한 무제 때이다(기원전 128∼123). 유명한 실크로드의 개척이 이루어진 후로 서역계의 무악(舞樂)이 전래되어 비파와 공후 그리고 호악(胡樂)과 호무(胡舞)가 전해졌다. 반대로 수와 당의 무악에 영향을 끼쳐, 칠부기(七部伎), 구부기(九部伎), 십부기(十部伎)와 같은 궁정 연회 무악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특히 무악이 발달하여 오히려 중국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또한 고구려는 광대한 만주와 요동지방을 바탕으로 강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왕조 체제가 굳건하여 지배 계층의 무덤까지 당시의 위세 당당했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많은 고분이 발굴되고 있어 고분 벽화와 유물을 통해 당시의 문화 예술과 무용 자료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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