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afe.daum.net/alhc/51q2/5801?docid=CxSE51q2580120110129180856
관련글 : "막리지(末松保和)"에 대한 반론 - 역사문  http://tadream.tistory.com/7654
* 한자를 한글로 바꿔서 올렸습니다.

막리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니사금에서 마립간으로의 전환이 어느 왕대인가는 삼국사기의 19대 눌지왕부터라는 설과 삼국유사의 17대 나물왕부터라는 설이 있다. 나는 사기. 유사 양설의 어떤 쪽이 옳고 다른 쪽이 그르다고 하기보다는 양설이 있는 것 자체에서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즉 나물에서 눌지에 이르는 동안에 니사금에서 마립간으로의 전환기가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환언하면 니사금은 어느 왕대, 어느 해를 정하여 마립간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이 니사금의 별명. 별칭으로서 마립간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갖게 이른 것은 마립간을 단순히 왕호(王号). 명사로 보지 않고 신라의 역사발전과 함께 성립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마립간과 막리지의 음성상의 비슷함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립간은 400년경에 시작되는 신라의 왕호이고 막리지는 642년경에 이르러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관호(官号)이므로 양자의 관계는 단지 음성의 비슷함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것만으로는 어떤 말이 신라와 고구려 양국에서 비슷한 의미로, 그러나 시대를 달리하여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신라의 마립간이란 왕호가 고구려에 흘러들어와, 그 최고의 관호로 되었다는 것은 양국의 역사. 문화의 전체적인 고찰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고구려의 官号 막리지가 신라에 들어가 마립간이라는 왕호로 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이다.
 
막리지는 642년의 연개소문의 영류왕 폐립사건에 관한 기사에 포함되어 있다. 양 당서 및 통전(通典) 등 모두 이 사건을 서술하고 있지만 자치통감 정관16년11월조의 기사가 이 사건의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요점을 잘 정리한 기사이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 참조할만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건 당시 연개소문의 직위「동부대인(東部大人)」에 관하여 살펴보면 구당서 본기는 단지「대신(大臣)」이라고 하고 고려전에는「서부대인(西部大人)」이라고 했다. 신당서 고려전은 연개소문의 부친을「동부대인 대대로(東部大人大對盧)」라고 하고 부친의 사후 그 직위를 이었다고 했고, 그때의 사정을 전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父爲東部大人大對盧, 死, 蓋蘇文當嗣, 國人惡之, 不得立, 頓首謝衆, 請攝職, 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嗣位
 
동부가 맞는지 서부가 맞는지 판정할 자료가 없지만 부친의 시대부터 부(部)의 대인, 즉 수장이었고 대대로였다고 하는 신당서의 기사는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에 막리지가 어떤 관인가의 설명은 모든 사서의 글이 대동소이하여 막리지가 단지 자칭, 사칭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리하여 막리지는 대대로와는 별개의 것이고 대대로 이상으로조차 생각되기도 한다. 더욱이 위지(魏志) 고려전 이하 양 당서의 고려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관명관제를 기록한 것은 상당히 상세함에도 불구하고 막리지는 거기에 기록되어있지 않다. 당서(周書)의 고려전을 비롯하여 모든 사서가 제1위의 관은 대대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종래 막리지를 고찰한 연구자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며 그 해석에 애를 먹은 것이다. 나이토(內藤)박사는 막리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상하게도 막리지와 같은 저명한 관직이 고려기(高麗記)에도 통전(通典), 신당서에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기에 보이는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는 그 음이 비슷하므로 이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 離(리)의 고음은 羅(라)이다.
 
 위에서 고려기란 한원 잔권(翰苑 殘卷)에 인용된 그 일문(逸文)을 가리키며, 막리지에 비견된 막하하라지는 하기와 같이 제2위 태태형(太大兄)의 일명(一名)으로 나온다.
 
 高麗記曰, 其國建官有九等, 其一曰吐捽, 比一品, 舊名大對盧, 惣知國事....次曰太大兄, 比二品, 一名莫何河羅支....
 
박사의 추정은 많은 암시를 주는 것이지만 그대로 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막리지는 대대로 이상의 것, 최고의 것이어야 함에도 막하하라지는 제2위의 태태형의 일명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만일 단지 음이 비슷한 것이라고 하면 다른 하나의 유력한 관명이 한원 소인(翰苑 所引)의 고려기 일문 중에 발견되기 때문이다.
 
 其武官曰大模達, 比衛將軍, 一名莫何邏繡支, 一名大幢主, 以皂衣頭大兄以上爲之
 
여기에 나오는 막하라수지가 그것이다. 막리지와 大對盧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면 양자는 일견 별개의 이름, 상하 구별의 이름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대대로는 이미 주서(周書) 고려전에서
 
其大對盧, 則疆弱相陵奪, 而目爲之, 不由王之署置也
 
라고 기술한 대로 부족제적(部族制的)인 성격을 갖는 직위이다. 연개소문은 부친의 사후 그 대대로의 직위를 세습하기 위하여 실력을 행사하지 않고 애소(哀訴:슬프게 하소연)의 수단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대대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실력을 행사하여 왕의 폐립까지 결행하고 그런 연후에 획득한 것이 막리지의 지위였다고 하면 대대로와 막리지의 관계는 본명과 별명(내지 일명)의 관계로,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것을 중국사료에서는 대대로와 막리지라고 전연 별개의 문자에 의한 표현을 한 것은 단지 문헌상. 수사상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우선 막리지의 어의에 관하여 고찰해 보면 나는 막리지와 막하하라지, 막하라수지의 삼어로부터 삼어에 공통되어있는 하나의 고어를 귀납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긴메이기) 7년조의 분주(分註)에 인용된「백제본기」의 기사에
 
高麗以正月丙午, 立中夫人子爲王, 年八歲,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其舅氏麁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麁群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二千餘人也
 
 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문중의 ‘정부인’을 석일본기의 훈에는 ‘마카리오리쿠쿠’라고 읽고 ‘세자’를 ‘마카리요모’라고 읽고 있다. 또 석일본기는 계체(継体:게이타이)천황 23년조에 나오는 신라의 上臣 伊叱夫礼智干岐의 ‘上臣’에 萬加利陁魯(마카리타로)라는 훈을 붙여놓았다. ‘마카리’ 라는 말의 의미는 추찰하기 어렵지 않으며,「正」또는「大」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문제의 三語에 이 古訓 ‘마카리’가 공통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을까? 나는 막리. 막하. 막하라 모두 마카리의 對訳이라고 생각하며 支는 고구려 官位의 제7의 대형(大兄)의 일명을 ‘힐지(纈支)’라고 하고 제10의 소형(小兄)의 일명을 ‘실지(失支)’라고 하는 例로 미루어 존경의 접미사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막리지는 극히 일반적인 따라서 극히 오랜 옛날부터 존재한 존칭명사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마카리’라는 형용어는 동부대인(東部大人)의 大, 대대로(大對盧)의 大의 훈으로도 된다. 관명의 이른바 일명. 별명은 통칭이고 속칭임과 동시에 또 가장 원시적인 이름이라고 해석해야 할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을 고려하면 대인(大人)이라고 하고 대대로(大對盧)라고 하여 한자에 의한 표현은 달라도 실질적으로는 동일하게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部)의 대인도 관명 제1위의 대대로도 똑같이 막리지라고 통칭되었던 것은 아닐까? 막리지야말로 원초적인 이름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돌아볼 것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묘지(墓誌)의 글이다. 그 묘지에는 남생의 세계(世系)와 경력을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曾祖子遊, 祖太祚, 並任莫離支, 父蓋金, 任太大對盧, 乃祖乃父, 良冶良弓, 並執兵鈐, 咸專國柄, 云云/
卄八, 任莫離支, 兼授三軍大將軍, 卅二加太莫離支, 摠錄軍國, 阿衡元首, 紹先疇之業, 士識歸心, 執危邦之權, 人無駮讓, 云云
 
전절의 세계에 의하면 막리지와 태대대로(太大對盧:대대로의 발전형태)의 순이 상기의 신당서의 기재와 역순이 되어있으며, 게다가 후절의 남생의 경력에 의하면 부 연개소문의 생존 중 이미 막리지로 임명되어 32세(부친의 사망 년)에 太막리지(막리지의 발전형태)가 더해졌다. 이런 기사에 의해서도 막리지와 대대로의 관계를 엄밀한 직관표상의 사실로서 일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문자 상의 발전과 분화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의 어느 정도까지의 정체. 고정을 상정하는 것이다. 나는 막리지가 이렇게 해석되는 것에 의하여 막리(莫離)를 마립(麻立)의 원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종래 마립의 해석은 橛(말뚝궐)의 mar, 頭(두)의 mar, 宗(종)의 maru 棟(마룻대동)의 maru 廳(청)의 maru 등 그것이 신라기원의 것으로서의 해석이었다. 또 고구려의 막리지와 동어라고 하는 설도 단지 음성의 비슷함을 지적하는 것에 머물렀다.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막리(莫離)의 원어를 ‘마카리’ 라고 하고 마립(麻立)은 막리(莫離)의 대역 자(對訳 字)로 하며, 따라서 마립간은 고구려기원의 칭호라고 본다.
 
「大人」또는「大首長」을 의미하는 고구려어 마카리支(막리지)는 신라에 들어가 신라화하여 마카리간(干)이 되었으며, 신라에서의 고구려세력의 성장에 동반하여 그 명칭도 상승하여 전장에서의 설명대로 고구려에 의하여 신라의 왕위가 좌우될 정도로까지 되었을 때 그 명칭은 왕호로까지 성장했다. 나물왕과 눌지왕의 사이에 왕호로서의 마립간이 확립한 연유는 이렇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니사금에서 마립간으로의 전환은 문헌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가위로 자르듯이 일선을 그어 생각할 사실은 아니라고 본다. 이마니시(今西龍)박사의 마립간.막리지 동어설은 거의 설명을 동반하지 않은 불만족스러운 것이지만 마립간왕호의 성립과 고구려의 관계에 관해서는 뛰어난 견해를 갖고 계셨다. 왈
 
 ‘마립간이라고 칭함은 왕위가 고구려의 힘에 의하여 좌우됨에 시작되어 그 후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와의 관계를 끊고서도 12대 동안 계속 이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
 
마립간시대는 지증왕 대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다음의 법흥왕 대가 비약적 개화기였다는 것, 다른 면에서 보면 고구려세력 배제의 완결기, 제2차 건국기였다는 것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수긍되는 바, 마립간호를 폐지하고 왕호를 사용하는 것도 후세에 말하는 것처럼 몇 년 몇 월 며칠의 법령으로 결정 실시된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기는 그 편수(編修)의 합리주의에서 일단 그것을 명시하고 있다. 즉 지증왕4년(503) 10월의 조에 국호 ‘신라’를 선정한 것, 종래 방언으로 불렸던 주권자의 존호를 ‘신라국왕’으로 바꾼 것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사(新羅史)의 제 문제』/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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