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대대로 (大對盧) - 브리태니커
토졸(吐捽)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시대의 관등.
제1관등으로 나라 일을 총괄하는 수상직이었다. 왕이 직접 임명하지 않고 5부(部)의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선거로 선출했으며 임기는 3년이었다. 6세기 후반 정치적 실권이 점차 왕에서 대대로로 넘어가자 국가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과 함께 국가의 기밀을 맡고 나라 일을 도모했으며, 군사를 뽑고 관직을 임명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의 무관 최고직인 대모달(大模達)이 될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말기에는 막리지(莫離支)가 국가 최고 실력자로 나오는데, 이 막리지를 대대로와 같이 수상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제2관등 태대형을 막리지의 다른 명칭으로 보고, 최고의 실력자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대대로[大對盧] - 민족문화대백과
고구려 제1위의 관등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임무를 지닌 고구려의 수상직.
대대로(大對盧)는 일명 ‘토졸(吐捽)’이라고도 한다. 부족장적 신분층에 속하는 대로(對盧)가 분화해 고구려 중기에 생겨난 것인데, 늦어도 6세기 후반경에는 대로 관등은 소멸되고 대대로만이 7세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대로의 분화는 4세기 이후 태왕권(太王權)의 확립과 관련이 있으며, 대로의 소멸 시기는 6세기 중반 귀족연립정권(貴族聯立政權)의 성립과 연관이 된다. 임기는 3년으로서 귀족회의에서 선거로 선출되었는데 이것은 지난날 부족연맹의 단계에서 연맹장을 선거에 의해 뽑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왕권이 약화되면서 정치적 실권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 시기 대대로 선임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귀족들의 상쟁이다.『한원(翰苑)』고려기(高麗記)에 의하면 귀족 중에서 서로 싸워 가장 강한 자가 스스로 대대로가 되었다. 이 때 왕은 귀족 간의 분규에 간여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후기에 대대로가 고구려 최고의 실권자가 되었으며 왕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대대로는 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과 함께 국가의 기밀을 맡고 정사를 도모하며, 병정을 징발하고 관작을 주었다. 그리고 이 5관등을 가진 자만이 고구려 최고의 무관직인 대모달(大模達)에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 사회에서 고위 귀족관료에 의한 합좌제도(合坐制度)가 시행되었고, 이들이 고구려 최고의 신분계급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고구려 말에는 막리지(莫離支)가 최고의 실력자로 등장하는데, 막리지는 바로 이 대대로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제2품계인 태대형이 실권을 장악하고 통치하면서 막리지라는 별명(別名)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 경우 대대로는 다수의 막리지들이 서로 합의 내지 상쟁하여 차지하는 최고의 막리지로 보기도 한다. 어떤 견해든 대체로 대대로와 막리지는 고구려 후기의 최고의 정치적 실권자이며,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주서(周書)』
『한원(翰苑)』
『고구려 정치사 연구』(임기환, 한나래, 2004)
「귀족연립정권의 성립」(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고구려국상고(高句麗國相考)상(上)·하(下)」(노중국, 『한국학보(韓國學報)』16·17, 1979)
「고구려·신라(高句麗·新羅)의 관계조직(官階組織)의 성립과정(成立過程)」(김철준,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한국고대사회연구(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知識産業社), 1975)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武田幸男, 『朝鮮學報』86, 1978)
태대대로[太大對盧] - 민족문화대백과
집필자 이도학
고구려시대의 관직.
귀족들에 의하여 선출되는 고구려 말기의 수상직으로서 제1관등인 대대로에서 분화, 발전된 것이다.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의하면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관직을 역임한 바 있다.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蕃閥志存)』에서는 천남생·천남산(泉男産)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13관등체제를 설정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태대대로는 제1관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직은 상설직이라기보다는 고구려 말기에 국사(國事)와 군사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신설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고구려간사(高句麗簡史)』(李殿福·孫玉良 공저, 강인구·김영수 공역, 삼성출판사, 1990)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고대(古代)(허흥식, 아세아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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