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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연개소문의 쿠데타
“소수가 다수를 뒤엎는 것은 속도 문제였다”
2011. 09. 07   00:00 입력 | 2013. 01. 05   07:09 수정

고구려 평양성의 해자 역할을 했던 보통강 전경. 필자제공


경기 연천군 무등리에서 1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철비늘 갑옷. 고구려를 대표하는 을지문덕·연개소문 등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태종이 설연타 칸에게 딸을 주기로 결정한 직후였다. 642년 11월 5일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보낸 파발마가 장안의 궁정에 도착했다. 동북지역에 긴급 상황이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급사의 손에 들려있는 서신이 개봉됐다. 장안의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 직전에 고구려에서 유혈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동북의 강국 고구려의 정변(政變)은 동아시아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사건의 소식은 만주를 지나 초원으로 들어갔고, 한반도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지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 열도까지 알려졌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신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가 대왕(영류왕)을 시해하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명을 죽였다. 이어 왕의 어린 조카를 왕(보장왕)으로 옹립했으며, 자기와 같은 성(姓)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 

‘이리가수미’의 ‘이리’는 고구려 말로서 못(淵)을 의미하며 ‘가수미’를 한자로 쓴 것이 개소문(蓋蘇文)이다. 고구려인들은 ‘연개소문’을 ‘이리가수미’라고 발음했다. 연개소문은 한문투의 말이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비롯한 고위 귀족 180명을 한꺼번에 죽이고 집권했다.

나중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대신이 왕을 죽이고 집권했다는 사실은 아스카(飛鳥)의 왜국 여왕에게 충격을 주었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나무지붕 궁정(板蓋宮)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소가씨(蘇我氏)의 저택이 있었다. 숭준(崇峻) 천황을 죽이고 자신을 옹립한 것도 소가씨였다. 여왕의 아들 천지(中大兄皇子)가 645년에 대신 소가이루카(蘇我入鹿))를 제거하고 그 일족을 멸문시킨 것은 고구려 정변의 반동적 여파였다. 앞서 642년 백제 의자왕의 숙청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의 아비 연태조(淵太祚)는 고구려 동부대인으로 동부의 병권을 장악하고 막리지 관등을 지닌 대귀족으로 세력을 떨쳤다. 그것은 그의 집안 누대에 걸쳐서 계속된 것이었다. 연씨 집안은 신흥귀족이었다. 6세기 중반 양원왕 즉위를 둘러싼 대규모 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를 고비로 성립된 귀족연립정권체제에서 연씨 집안은 유력 귀족으로서 세력을 굳혀 나갔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을 때 고위 귀족들의 견제가 있었다. 그가 모두에게 머리를 숙이고 청해 겨우 동부대인 습직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동부의 군병을 장악해 온 연씨 집안의 연고권과 위세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인격과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 ‘신당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신이 건무(영류왕)와 상의해 죽이기로 했다.” 이 기록은 중국에서 연개소문을 폄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전적인 조작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가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타인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 군대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대세력가가 행실이 그렇다면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의 악폐가 심각했던 것 같다. 고구려 국왕까지도 그를 제거하는 데 동의할 정도였다.

영류왕은 인사발령을 내렸다.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성 현장 감찰직에 임명했다. 그것은 연개소문이 일단 평양에서 유리되는 죽음의 실각이었다. 하지만 왕과 100여 명의 대신들이 공모한 연개소문 암살계획은 만인의 비밀이 돼 비밀의 힘을 상실했다. 

모의내용을 알아차린 연개소문은 자신이 죽음의 낭떠러지 끝에 몰려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왕과 고위 귀족 모두를 상대로 일당백의 싸움이었다. 너무나 불리한,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게임이었다. 연개소문이 이러한 절명의 순간을 어떻게 돌파했는지 살펴보면, 23년간 고구려를 이끌어 온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5부의 병력 모두를 소집해 치러지는 사열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연개소문의 의지대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대신이 참석해야 하는 공식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지만 모두가 빠질 수도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행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그날이 연개소문의 마지막이 됐을 수도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재구성해 보자. 

가을이 깊어가는 642년 9월이었다.(‘일본서기’) 평양성 남쪽 광장에서 아침부터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가 진동했다. 술을 가득 담은 큰 항아리를 실은 수레들이 연이어 도착했고, 시종들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술과 음식을 날랐다. 약간 높은 지대에 화려하고 거대한 천막이 세워졌고, 그곳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축제 분위기가 완연한 가운데 백성들은 들떠 있었다. 점심 무렵 멀리서 대신들을 실은 호화찬란한 수레들이 줄지어 오고 있었다. 대신들은 도착하는 즉시 천막 아래의 잘 차려진 자리에 앉았다. 관등의 서열별로 지정된 자리였다. 100여 명의 대신들이 착석한 가운데 대낮부터 술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임식 행사의 일환으로 광장에서 5부 병사들의 열병식이 있을 예정이었다.(‘신당서’ “悉召諸部”) 연개소문 휘하의 병력은 5부의 하나인 동부의 그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동부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질서 있게 도열한 동부의 기병들이 갑자기 대신들이 모두 앉아 있는 술좌석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대신 100명이 한꺼번에 어육이 되고 온 식장이 피로 물들었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많은 고위 귀족들의 고귀한 피가 평양의 땅바닥을 적신 적은 없었다. 

연개소문을 영웅시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든 대신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장에 이르러 유량히 울려 퍼지는 군악 아래 인도돼 군막 안에 들어 자리에 앉았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연개소문이 갑자기 반적(反賊)을 잡아라! 하고 외치고, 주위에 대령했던 장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칼ㆍ도끼ㆍ몽둥이로 일제히 외치니, 참석한 대신들도 다 백전노장이었지만 겹겹이 포위됐고 게다가 수효가 너무도 적어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연개소문은 기병을 이끌고 곧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었다. 나머지 4부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을 처리해야 했다. 계획대로 그의 부하들이 평양성의 창고에 불을 질렀다. 궁문을 지키는 수졸들이 불을 끄기 위해 자리를 이탈했고, 연개소문과 그의 기병이 곧바로 왕궁으로 들어갔다.(‘구당서’ “焚倉庫 因馳入王宮”) 

경호원들의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둘씩 소모됐고, 마지막 남은 자가 쓰러지자 연개소문은 바로 영류왕이 거처하는 대전으로 들어갔다. 영류왕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직접 보고 정변이 일어났고,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손수 그 왕을 시해하고 잘라서 몇 동강을 내어 시궁창에 버렸다.” 토막 난 시신은 사람들이 보라는 듯이 버려졌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왕을 곧바로 죽이고 그 시신을 보여 주어야 상대방들이 기가 꺾여 흩어질 것이고 반격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현재의 왕이 사라져야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을 즉석에서 옹립할 수 있다. 소수가 다수를 뒤엎는 쿠데타에서 모든 것은 속도 문제였다. 

위기의 순간에 발휘된 능력이 진정한 능력이다. 연개소문은 왕과 대신 100여 명을 한 순간에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그의 성공적인 쿠데타는 치밀한 계획과 꺾이지 않는 투지의 결과였다. 모든 것을 떠나 쿠데타 그 자체의 완결성만 본다면, 연개소문만 한 행동의 천재는 역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626년 당태종의 현무문 쿠데타를 능가하는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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