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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7)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연개소문 이름에 제철왕국 비밀 있다
일본식 훈독 표기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는 ‘연못가의 무쇠’ 뜻해
2008년 08월 14일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이름 ‘이리가수미’는 다분히 일본어화된 훈독(訓讀) 부름새라 할 수 있다. 이 훈독 부름새를 통해 우리는 연개소문 이름의 참뜻을 추적할 수 있다.
‘연개소문’의 이름 풀이
<일본서기>에 실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일본식 이름은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いりかすみ)’다. ‘이리’는 성(姓), ‘가수미’는 이름이다.
우리가 부르는 ‘연개소문’은 한자의 음독(音讀) 부름새이고,‘이리가수미’는 일본어화된 훈독(訓讀) 부름새라 할 수 있다. 비록 일본어화되어 있기는 하나 이를 통해 우리는 연개소문 이름의 참뜻을 추적할 수 있다.
ㅋ▶ 고대 제철용수로 쓰인 일본 나라현(奈良縣) 아스카촌(明日香村)에 있는 와다(和田) 연못.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물로, 연못이 항상 어른거리고 있다.
성은 ‘연’ 이름은 ‘무쇠 갈기’
‘이리’란 연(淵), 즉 ‘연못’ ‘샘’의 고구려말 ‘얼(한자로 於乙이라 표기)’이 일본어화된 것이다. ‘가’는 개(蓋)에 해당되는 낱말로 ‘가장자리’ 또는 ‘(무쇠)갈기’의 ‘가’를 가리킨다.
한편 ‘수미’는 소문(蘇文)과 같은 낱말로 ‘숨’ ‘솜’(또는 수·소)이라고도 했다. ‘무쇠’ ‘금’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이다. 따라서 ‘이리가수미’란 ‘연못가의 무쇠’ ‘연못가의 금’ 또는 ‘연못·무쇠 갈기’ ‘연못·금 갈기’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연못’이 성이요, ‘무쇠(금) 갈기’가 이름이다.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신당서(新唐書·당나라 역사책으로, 구당서를 다시 엮은 것)> 고려전(高麗傳·고구려에 관한 대목)에 ‘개소문은 그 호를 개금(蓋金)이라고도 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못가의 무쇠(또는 금)’라는 뜻보다는 성은 ‘연’씨, 이름은 ‘무쇠(금) 갈기’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무쇠(금) 갈기란 무쇠나 금을 두드려 단야(鍛冶)하는 일을 말한다.
제철, 즉 ‘무쇠 불리기’나 단야, 즉 ‘무쇠 갈기’를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대량의 물’이다. 따라서 수도시설이 없던 옛날엔 제철소나 단야공장은 항상 물이 가득한 큰 못가나 샘가에 지어졌다. 땅 속에서 물이 항상 치솟아 오르기 때문에 연못이나 샘은 늘 어른거린다. 그래서 ‘얼’이라 불렸던 것이다.
고구려말도 기술과 함께 전해져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고구려말을 꼽아 보자.
고구려에서는 납을 ‘나믈’이라 불렀다. 한자로는‘나물(那勿)’인데 ‘남은 것’이라는 뜻으로 이같이 불렸다고 한다. 납은 은(銀)과 붙은 상태로 캐지는데 은을 도려낸 나머지 광석이라 해서 ‘나믈’이라 불린 것이다. 나믈이 현대어 납으로 바뀐 것이다. 나믈은 일본에 건너가 납을 가리키는‘나마리(なまり)’로 바뀌었다.
납은 산화(酸化)시키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빛깔의 그림물감이 된다. 납을 빨갛게 달궈 녹인 뒤 공기와 접촉해 산화시키면 아름다운 안료를 만들 수 있다. 갑자기 식힌 것은 연노랑, 즉 은빛깔로, 천천히 식힌 것은 빨간 빛이 도는 노랑, 즉 황금빛깔로 변한다.
들기름에 이 안료를 섞어서 끓여 만든 물감으로 그리는 유화의 기법은 7세기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해졌다. 기술과 함께 언어도 이동한다.
천무는 일본 최초 점성대 세워
<일본서기>의 덴무(天武·천무)천황 대목의 첫장에는 ‘천문(天文)과 둔갑(遁甲)에 능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덴지(天智·천지) 등 다른 천황들 대목에는 보이지 않는 서술이다.
덴무가 점성술이나 오행술(五行術)에 조예가 깊고 기문(奇門) 둔갑술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즉위한 지 4년(675년) 된 해에 일본 최초의 점성대(占星臺)를 지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이에 앞선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 지었다는 첨성대(瞻星臺·국보 제31호)가 덴무천황이 지었다는 점성대와 흡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첨성대는 ‘점성대’라고도 불렸다 하니, 두 점성대 간의 일치성을 더욱 짐작하게 한다. 첨성대의 높이는 19척 5촌, 위의 원(圓)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원 둘레는 35척 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 있어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별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실물과 일치되는 기록이다.
고구려에도 첨성대는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里)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신라 첨성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가히 ‘천문학적인’ 기적인가.
별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과 한 해 농사를 점치기 위해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바로잡기 위해 일월(日月)·오성(五星) 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덴무천황이 축조한 점성대에서는 이 두 가지 목적 외에 천제(天祭)까지 지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덴무는 쿠데타 길목에서도 길흉을 점쳤고, 천신(天神)을 향해 제를 올린 인물이다.
<인재개발원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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