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군이 백수산에서 패배하고, 신라가 구원하다. ( 672년 12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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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壬申歳, 十二月, 髙侃與我餘衆, 戰干校勘 031 白氷山破之. 新羅遣兵救我, 髙侃擊克之, 虜獲二千人.
校勘 031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于로 되어 있다. 干은 오자이다.
〔당 고종 함형〕3년 임신년(672)註 001 12월에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註 002에서 싸워 〔우리 무리를〕 패배시켰다. 신라가 병력을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는데 고간이 이를 쳐서 이기고 2,000명을 사로잡았다.註 003
주
註 001 3년 임신년 :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2년조에 의하면, 고간이 이끄는 당군은 672년 8월에 평양에 군영을 짓고 인근의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함락시키고 백수성(白水城)에서 500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하여 군영을 설치하였는데,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군들이 연합하여 당군과 싸워 수천 명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후퇴하는 고간의 당군을 추격하던 신라의 주력이 공을 다투어 병력을 분산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황해도의 석문(石門) 전투에서 당군에게 격파되고 말았다.
註 002 백수산(白水山) :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12년 8월조에는 ‘白水城’, 『자치통감』 권202 당기18 고종 함형2년(672) 12월조에는 ‘白水山’, 『신당서』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는 ‘천산(泉山)’이라고 하였다. 그 위치를 현재의 황해남도 신원군 동북 지역(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439-440쪽) 또는 예성강 하류로 보는 견해(이병도, 118쪽), 재령강 주변으로 보는 견해(최재도, 154-155쪽) 등이 있다. 한편 본서 권37 잡지 제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도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의 찬자는 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30, 「고구려멸망후 유민의 반란 및 당과 신라의 관계(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の關係)」, 『만선지리역사연구(滿鮮地理歷史硏究)』 12
이병도, 1977, 『역주 삼국사기(譯註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최재도, 2015, 「한성(漢城)의 고구려국 재검토(高句麗國 再檢討)」, 『동북아역사논총』 47
註 003 신라가 병력을 보내 …… 2,000명을 사로잡았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2 당기18 고종 함형 3년(672) 12월조 및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동이 고려에 의하면 횡수(橫水) 전투에서 신라군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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