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지지 모임이 북한 지령 받고 활동?
국가보훈처도 지난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나라사랑교육’ 이라는 명목으로 야당을 비난하고,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등을 ‘종북’으로 몰아붙인 DVD 내용을...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321호] 승인 2013.11.11 08:50:22
시끄러운 기계음과 암호를 주고받는 듯한 외국어 목소리. 흡사 전쟁 영화의 시작처럼 보인다. 화면은 빠르게 바뀌면서 ‘경기도 평택 대추리’ ‘전라북도 부안’ ‘제주도 강정마을’이라는 자막과 함께 GPS 지도가 줄을 잇는다.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화면을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혈관이 막히고 있다. 전 국토를 뒤덮은 검은 물결.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르고 있는 그들.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반대인가.” 곧이어 제목 자막이 등장한다. ‘위험한 반대, 그 어두운 그림자.’
국가보훈처가 2011년 말에 제작한 <호국보훈 교육>이라는 DVD 세트, 11개 CD 속 58개 동영상 중 하나다. 보훈처는 이 DVD를 2012년 초 전국 학교 등에 배포했다. 또 보훈처가 실시하는 강의 1411회 동안 200만여 명을 대상으로 이 동영상을 보여줬다. 이 동영상이 논란에 휩싸였다.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에 이어 보훈처도 선거와 정치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이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지난 1월 서울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에서 “국방부는 군사대결 업무를 하고 국가보훈처는 이념대결 업무를 한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이념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 보훈 업무를 추진했다”라고 말했다. DVD 내용에 따르면, 웬만한 정부 비판 세력은 종북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쌍용차 옥쇄파업,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등은 국가보훈처 <호국보훈 교육>의 단골 메뉴였다. DVD 전체 58개 동영상 내용을 살펴봤다.
<호국보훈 교육> DVD가 종북 세력과 연계되었다고 꼽은 2008년 촛불집회.
제주 해군기지 반대 영상에는 김일성 동상이 등장한다.
북한이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개입?
9분37초짜리 ‘위험한 반대, 그 어두운 그림자’ 동영상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목에 명시된 반대의 그림자는 북한이라는 뜻이다. DVD 제작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제주 해군기지 반대를 예로 들었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흔들기 위해 은밀한 반대를 조장해왔던 북한. 이번에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나섰다. 무엇보다 북한이 각종 대남 매체를 통해 사실을 왜곡하고 심지어 시위를 사주하는 지령을 내리면 이를 충실히 따르는 불순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성우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에 나오는 장면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비판하는 북한 <노동신문> 기사에 이어 김일성 동상 뒤로 ‘해군기지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달린 옷을 입은 사람이다. 연이어 “그것은 이와 같은 시위와 반대 활동이 단순한 사회참여로 여겨져서는 안 될 이유이며 거기에는 검은 의도와 실체가 도사리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배경화면에는 <동아일보> 사설 ‘안보 흔드는 간첩과 종북 세력, 이대로 둘 순 없다’ 등이 등장한다. ‘정부 비판 세력=종북’으로 묶는 논리는 동영상 내내 등장한다.
그러다 같은 동영상 말미에 “한편 4대강 사업 또한 온갖 논란을 뒤로하고 미래 녹색 성장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라는 설명을 한다. 지금 와서 하나둘 드러나고 있는 4대강의 문제점이 당시에는 논쟁거리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다소 뜬금없는 화면 구성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사람 또한 ‘종북’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이런 DVD의 의도는 또 다른 동영상과 PPT(파워포인트 자료)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동영상과 PPT 제목은 ‘북한의 대남전략은 무엇인가’다. 이 PPT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북한이 종북 세력과 연계해 사회 혼란을 조장한 예로 꼽고 있다. ‘촛불집회 기간 동안 주도적 역할을 한 단체들은 북한과 똑같이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는 종북 세력’ ‘순수 시민운동을 가장한 반정부·반미 투쟁이었던 촛불시위’ ‘최근 북한은 우리 사회의 종북 세력과 연계하여 순수 시민운동을 가장한 폭력 시위 등을 통해 사회혼란 조장에 적극 나섬’이라고 쓰여 있다.
재외 국민의 시위도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식의 내용이 나온다.
동영상이 ‘비겁한 평화’를 두둔했다며 비난한 게시물은 사진 전시회 소개다.
당시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참여연대와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 등을 종북으로 규정한 셈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말을 하더라도 그 주장이 북한과 일치할 경우에는 무조건 종북이라는 공식을 세워놓은 것이다. 먹을거리 안전을 두고 일반 시민들의 성난 민심에 불이 붙자, 당시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으며 “국민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고 반성했다”라고 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를 머쓱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2009년 쌍용차 옥쇄파업 화면을 배경으로 깔며 “국가보안법 폐지와 안보 수사기관 해체로 정부의 안보력을 약화시켜 종북 세력의 활동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화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바로 자주 민족 통일인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쌍용차 사태는 노사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보법과 국정원 등 공안 사건을 언급하며 쌍용차 파업 장면을 연결지었다.
쌍용차 사태를 적화 통일과 연결하기도
게다가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은 재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작에까지 미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보여주는 화면은 2011년 미국 워싱턴 주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탄핵 시위. ‘Pres. MB Lee of South Korea, Step Down(한국 이명박 대통령은 물러나라)!’이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재외 동포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미국 현지의 한인 언론에 따르면,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단체는 ‘사람 사는 세상 워싱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시애틀’ 등이다. 사실상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모임인 단체를 종북으로 매도하는 모양새다.
국가보훈처가 만든 ‘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가’ PPT 중 한 슬라이드.
‘북한의 대남전략은 무엇인가’ PPT 중 한 슬라이드.
보훈처가 만든 DVD 논리대로라면 암약하는 종북 세력이 수없이 많은데도, 국민들은 그 종북 세력의 실체를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도 DVD는 설명한다. ‘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가’라는 제목의 PPT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먼저 북한과 종북 세력이 용어 혼란 전술을 사용해 ‘민주화운동 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 등을 종북 세력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하지만 DVD에서는 민주화운동과 평화운동 세력 대부분을 종북으로 묘사하는 듯한 화면 편집을 한다). 게다가 종북 세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 데에는 전교조와 일부 언론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전교조의 치밀하고 지속적인 친북·반미 교육’ ‘종북 좌파에 장악당한 방송, 언론 및 인터넷 매체의 영향력’ 때문에 국민들이 종북 세력의 극악함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저기 종북 딱지를 붙이다 보니 황당한 화면도 나온다. ‘비겁한 평화는 전쟁을 부른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에서는 체 게바라와 쿠바 사진을 소개하는 블로그를 종북 카테고리에 넣었다. 11분47초짜리 이 동영상은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된 분위기를 비판하면서도 대화를 하자는 이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오늘 우리 사회 일부에서 평화라는 구호 아래 제기되고 있는 각종 주장들이 과연 전쟁을 막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화면이 시작된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전쟁 대 평화’ 프레임으로 분위기를 끌고 간 것을 의식하고 만든 동영상으로 보인다. ‘6·2에는 투표하러 고고씽’ ‘가난을 밝혀야 밥 줄 건가요’와 같이 2010년 지방선거 주요 의제였던 무상급식과 투표 독려 등이 배경화면으로 나온다. 그런 다음 “비겁한 평화는 전쟁을 부른다”라고 규정한다. “또한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면서 북한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라며 그런 주장이 얼마나 흔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를 검색한 결과를 비춘다.
문제는 동영상이 비판하고 있는 ‘비겁한 평화’를 두둔한 게시물을 실제로 찾아서 들어가 보면, 종북 세력이나 북한이 남긴 게시물이 아닌 평범한 전시회 소개 글이라는 점이다. 체 게바라와 쿠바를 주로 찍었던 쿠바 출신 코르다라는 사진작가의 사진전은 심지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아나운서협회 등이 후원했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에 따르면, 이 동영상은 정부부처뿐 아니라 예비군 훈련장에도 대량으로 배포되어 상영되었다. 또 통일부가 운영을 지원하는 전국 통일관 중 13곳에서 지난해부터 일반인을 상대로 틀었다는 사실이 민주당 우상호 의원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국가보훈처의 <호국보훈 교육> DVD에는 배우 이준기씨도 등장한다.
안보와 관계없는 4대강 사업 홍보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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