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226092327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4) 세계를 향해 기염을 토하는 훙산문화

정수일|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2.26 09:23 수정 : 2009.08.19 11:31 


가장 오랜 문화는 무언으로 자신을 증언했다


츠펑시 부근 싱룽와(興隆窪)에 있는 ‘중국 제1마을’의 발굴 현장. | 김문석기자


차오양을 빠져나오자 길은 조금씩 고도를 높인다. 160㎞ 떨어진 훙산문화의 심장 츠펑(赤峰)을 향해 차는 시속 60㎞의 속도로 달린다. 얼마쯤 달리자 차창이 빗방울을 머금기 시작한다. 좀처럼 내리지 않는 가을비라고 한다. 그러다가 랴오닝성과 내몽고자치구의 경계에 이르자 촉촉이 내리던 비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금세 해가 난다. 이것이 초원이나 사막에서 가끔씩 내리는 여우비다. 초원이 길손을 반기는 징조라고 현지 안내원이 귀띔한다. 일행은 웅성거린다. 이제부터 그리던 초원 실크로드 답사는 시작된다. 근 4시간을 달려 정오가 넘어서야 츠펑에 도착했다.


내몽고자치구에는 치소인 우란하오터을 비롯해 9개 시와 3개 맹(盟)이 있는데, 츠펑은 그 가운데 한 시다. 츠펑시는 외곽의 7개 기(旗)와 2개 현(縣)을 거느리고 있는데, 총 면적은 남한 면적에 육박하는 9만㎢에 달하지만, 인구는 450만명밖에 안 된다. 청대의 현에서 1947년 시로 승격한 츠펑시 중심에는 훙산구 등 3개 구가 있으며, 인구는 약 36만명이다. ‘츠펑’은 ‘붉은 산봉우리’란 뜻인데, 이 말은 시 동북쪽에 있는 ‘붉은 산’, 즉 ‘홍산’(몽골어로는 ‘우란하타’, 암홍색 화강암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람들은 ‘츠펑’ 하면 곧 ‘훙산문화’를 연상한다. 그것은 이 훙산을 비롯해 인근 여러 지역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오래된 유적·유물이 숱하게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총괄해 ‘훙산문화’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다. 그는 1906년 츠펑 일대(당시는 열하성) 지표조사를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를 발견한다. 그의 조사는 결과야 어떻든 간에 만주와 내몽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다. 마치 ‘조선학’이 조선 침략을 위한 일본의 계산된 관학처럼 말이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교토대를 중심으로 해 이른바 ‘만주학’이란 또 하나의 관학이 발족되어 동북 3성에 관한 정보 탐지에 악용되었다. 학문이야 순수하지만, 악용되면 독약이 되는 법이다. 아무튼 이것이 발단이 되어 츠펑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굉장한 유물들이 속속 꼬리를 물고 발굴되었다. 드디어 1955년에는 이러한 유물들이 시사하는 문화 일체를 ‘훙산문화’라고 명명했다.


훙산문화란 한마디로 츠펑(훙산)을 중심으로 한 랴오시 지역에서 생성한 신석기시대 위주의 문화 집합체를 말한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놓고 보면 포괄 범위는 동으로는 차오양, 남으로는 발해만, 서로는 내몽고 초원, 북으로는 대흥안령 남록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 문화가 주종이지만, 청동기시대나 동석(銅石)병용시대 문화 등 여러 문화를 갈무리하고 있다. 문화적 성격면에서도 초기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정주농경문화 등 다종다양하다. 15만년 전 인류의 거주를 비롯해 구석기 문화도 관련되어 있다.


이 문화 집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문화들로는 ‘중화제1촌’ ‘중화시조취락’이라고 하는 싱룽와(興隆窪) 문화(8000년 전), 훙산 문화(6000년 전), 뉴허량(牛河梁) 문화(5000년 전), 샤오허옌(小河沿) 문화(4900년 전), 샤자뎬(夏家店) 상·하층 문화(4200~3300년 전), 링허(凌河) 문화(2800년 전) 등이 있다, 훙산문화 유적의 밀도는 정말로 가관이다. 이것은 이 문화의 유구성과 다양성을 말해준다. 예컨대 츠펑 인근의 오한기(敖漢旗) 한 기에만도 옥과 토기로 유명한 싱룽와문화와 샤오허옌문화, 샤자뎬문화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우리나라 충청북도보다도 작은 8300㎢의 이 오한기에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보다도 더 많은 유적(신석기 유적 1000여곳, 청동기 유적 2000여곳)이 지척에 깔려 있다.



인구 60만명이 사는 이 오한기에는 아직 ‘파보지 못한 땅’이 수두룩하다. 츠펑과 오한기를 포함한 이 유적지는 해발 600m의 고원 평지로서 대부분이 가경지와 초지다. 지금은 강수량이 300㎜밖에 안 되는 건조한 고장이지만, 기원전 5~3세기쯤까지만 해도 강수량이 꽤 많았다. 게다가 광물도 다양하고 토양도 토기 제작에 적격인 찰흙이다. 이 모든 자연 조건은 일찍이 훙산문화와 같은 뛰어난 문명의 생성에 유리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 조건은 어디까지나 문명 생성의 객관적 필요조건이지,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이란 유리한 자연환경에다가 이런 환경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슬기와 노력이 합쳐진 것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은 언제 어디서나 항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불리한 환경의 도전에 성과적으로 응전했을 때, 더 튼실하고 생명력 있는 문명이 창출되고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문명 생성에 관한 토인비식 ‘도전과 응전 논리’다. 모름지기 훙산문화도 역사의 어느 계기에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르는 엄혹한 시련(도전)을 겪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 문화 창조 주역들의 뛰어난 슬기와 노력으로 그러한 시련을 잘 이겨냈기 때문에 비로소 그토록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가 생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리한 자연환경에서만 이 융성 요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리했던, 그래서 더욱 훌륭할 수 있었던 요인도 함께 탐구해야 할 것이다.


평소 이러한 문명지론에 동조하고 그 실증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필자로서는 이 ‘세계적 문명’ 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늦점심을 먹고 나서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츠펑박물관을 찾았다. 아담하게 꾸려놓은 3층짜리 현대적 건물이다. 관심 가는 훙산문화 전시품들은 2층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40대 중반의 여성 해설원은 이 문화의 ‘세계성’과 ‘초창성’에 초점을 맞춰 거듭거듭 강조한다. 수긍과 재고(再考)가 엇갈리나, 일단 해설을 경청했다.


오늘 훙산문화는 몇 가지 내용에서 ‘가장 오래됨’을 자랑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을 저만치 앞질렀다는 것이다. 다링(大凌)강 서쪽 강안에 위치한 당산(唐山) 절벽에 있는 비둘기 동굴(合鳥 子洞)에서는 15만년 전 원시인간이 불을 사용한 흔적과 함께 300여점의 석기류와 호랑이. 야생말. 산양 등 30가지가 넘는 포유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60㎞쯤 떨어진 젠핑(建平)현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5만년 전 ‘젠핑인’의 생활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구석시시대를 이어 나타난 것이 훙산문화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오한기의 싱룽와(興隆窪) 문화다.


‘중화제1촌’ ‘중화시조취락’, 즉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 마을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175채의 집이 10채 단위로 줄지어 계획도시처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주위는 마치 해자(垓字)처럼 도랑으로 에워싸여 있다. 여기서 빗살무늬토기와 옥기가 발견되었다. 사실 인류 최초의 농경문화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이라크)의 어느 취락에서도 이렇게 정연하게 짜여진 촌락이 발견된 적이 없다. 1983~94년 모두 7차에 걸쳐 발굴한 이 마을의 면적은 무려 4만㎡에 달하는데, 집 자리 규모는 보통 60㎡(약 18평)이며 한복판에 있는 가장 큰 두 집은 140㎡나 된다. 이 두 집에는 우두머리가 살았거나, 아니면 집회장이나 종교의식장으로 쓰였을 것이다. 집집마다 생산도구나 취사용구를 갖추고 있으며, 식품저장용 움막까지 갖추고 있다. 같은 열에 속하는 가족끼리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주민들은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일정한 사회적 조직과 활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 일종의 씨족사회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200㎞ 떨어진 차하이(査海)에서도 55채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구조나 유물들은 싱룽와와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두 곳을 한데 묶어 싱룽와-차하이문화라고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돼지가 사람과 함께 순장된 사실인데, 이것은 돼지가 일찍부터 종교제의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옥귀고리와 옥룡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옥기라고 해서 츠펑시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 지금은 다 풀밭과 옥수수밭 속에 묻혀 인간의 접근을 불허한 채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 무언의 증언을 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갖가지 채도 유물에는 슬픈 사연이 묻어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계몽운동의 선구자로 꼽히는 량치차오(梁啓超)의 아들이자 중국 고고학의 제1 세대인 량쓰융(梁思永)은 1930년 열악한 학술환경 속에서도 츠펑 일대에서 중원의 앙소(仰韶)식 채도 여러 점을 발견한다. 그는 중원과 만리장성 밖의 문화적 연관성을 주장하면서 이듬해에는 야망 찬 동북 고고학 탐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바로 이즈음 일본이 만주 침략의 마각을 드러내면서 관학자들을 투입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2년 뒤인 1933년에 집총한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야하다 이치로(八幡一郞)가 이끄는 제1차 만몽학술조사단이, 이어 1935년에는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축이 된 일본고고학회가 들이닥친다. 그들의 의도는 중원과 무관하다는 이른바 ‘독립성’을 내세워 만주를 중국 판도에서 떼어내자는 것이다. 다행히 그 못된 시도는 얼마 못 가서 부서지고 만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보다시피, 훙산문화는 화하족(華夏族)이 창조한 중원의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된 문화라는 것이 그 주창자들의 주장이다. 여러 문화 중 훙산문화(6000년 전)를 기준으로 잡더라도 1000여년을 앞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문명보다 그 편년이 더 올라가는 셈이다. 그래서 훙산문화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이 문화가 화하족이 창조한 중원문화와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채도와 같이 상관문화도 있지만, 크게 다른 점도 있다. 예컨대, 여기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나 적석총(積石塚) 같은 유물이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것들이 두 지역 문화를 구분짓게 하는 증거물이다.


박물관 참관을 마치고 해가 서산에 걸려있을 무렵 이 문화의 연고지 훙산을 찾았다. 시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이 산은 온통 암홍색 화강암이다. 바위 면을 살짝 긁어보니 희누르스름한 속살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붉은 물감을 칠한 가짜 붉은 산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사실 이 산 돌은 여러 가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햇빛에 노출되면 이렇게 붉은 색깔을 띠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가짜가 아니고 진짜다. 세상만사의 가짜와 진짜에는 필히 그럴 법한 이치가 있게 마련이다. 일행이 표고 500m 중턱에 있는 정자에 둘러앉은 참에 필자는 이 훙산문화와 우리 문화의 관련성이라든가 예단되는 ‘역사전쟁’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내용은 다음 회에 싣기로 하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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