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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성 (丹東 鳳凰山城)


中國 遼寧省 丹東市 鳳城滿族自治縣(중국 요녕성 단동시 봉성만주자지현)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으로, 鳳城縣(봉성시)에서 동남쪽으로 4㎞ 떨어진 봉황산에 자리잡고 있다. 봉황산은 압록강 하구와 요동(遼東)평야 사이의 천산(千山)산맥 협곡 남단에 있는데, 이 성에서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는 120리 구간은 험준한 협곡으로 고대로부터 요동평야와 압록강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지금도 남쪽 2.5㎞ 지점에 고려역(高麗驛)이 있으며, 산성의 서남-서북쪽으로 단동(丹東)에서 심양(沈陽)으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이 성은 중국 경내에서 확인된 고구려 산성 중 규모가 가장 크며, 고구려 오골성(烏骨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봉황산은 경치가 수려하고 산세가 매우 험준하다. 서북쪽의 봉황산 주봉에서 타원형을 그리며 좌우로 뻗어내린 험준한 능선을 천연성벽으로 삼고, 능선 사이의 낮은 곳에는 다듬은 돌로 인공성벽을 쌓았다. 천연성벽이 87곳, 인공성벽이 86곳에 이를 정도로 양자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성벽을 이루고 있다. 산성의 평면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며, 전체 둘레는 15,995m에 달한다. 그 중 석축 성벽은 7,525m이며,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부분은 2,355m이다. 동북벽의 길이는 4㎞이며, 높이는 6~8m, 상부 폭은 2m 정도이다. 남면의 골짜기 입구에는 흙과 돌을 혼합하여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성의 동북쪽 역시 인공적으로 쌓았는데, 이 성벽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다.


성벽이 굽어지는 모서리에는 대체로 관측을 위한 고대(高臺)를 구축해 놓았다. 일부 험준한 지역의 성 바깥쪽에는 치성(雉城?馬面)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문지는 남문지와 북문지가 확인된다. 남문은 이 산성의 중심 성문으로 계곡에 설치되어 있는데, 병마(兵馬)와 차량이 대량으로 통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남문지의 폭은 약 5m로 옹성을 가지고 있다. 북문은 양쪽 산줄기 사이의 중간 부분인 계곡 입구에 위치하며, 폭은 3m 정도이고 역시 옹성이 딸려 있다.


이렇게 험준한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산성 내부에는 광활한 평지가 펼쳐진다. 지금도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산성 내부는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획되는데, 내성이 중심을 이룬다. 성 안에서는 고구려 시기의 붉은색 노끈무늬기와가 많이 발견되었고, 연화문 와당과 토기의 저부나 손잡이도 발견되었다.


고구려 산성 가운데 집안(集安)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평양 대성산성과 함께 가장 큰 편에 속하며, 주변에는 위성이 많다. 『요동지(遼東志)』에는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언골산(焉骨山; 烏骨山)은 나라 서북쪽에 있는데 평양에서 700리 거리이다. 동,서에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 산줄기가 있는데 검푸른 암석으로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형문삼협(荊門三峽)과 같다. 절벽 위에는 푸른 소나무 외에 다른 초목은 없고 구름이 걸려 있다. 고구려는 남쪽과 북쪽 양 입구에 차단벽을 쌓아 성으로 삼았는데, 고구려에서 가장 요충지이다?"라고 오골성(烏骨城)의  모습을 서술하였는데, 봉황산성의 지세와 일치한다. 한편 산성의 축조방식과 형태, 위성(衛城) 체계 등이 국내성(國內城)이나 평양성(平壤城: 長安城)과 같다는 것을 근거로 부수도(副首都) 북평양이 이곳에 설치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鳳凰山山城 調査簡報(崔玉寬, 遼海文物學刊 2, 1994), 

中國內의 高句麗遺蹟(李殿福 著, 車勇杰 外 譯, 學硏文化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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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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