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daum.net/v/20210319150307642

 

남생은 왜 당에 투항하였나?

 

고구려사 명장면 119
임기환 2021. 3. 19. 15:03
 
666년 6월 고구려 태막리지 남생(男生)의 아들 헌성(獻誠)이 당의 조정에 도착했다. 헌성이 당에 온 목적은 아버지 남생의 투항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남생은 이미 직전에 측근인 대형(大兄) 염유를 당에 보내 투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 조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느닷없는 남생의 투항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그래서 남생은 열여섯 살에 불과한 아들 헌성을 다시 당으로 보낸 것이다. 즉 자신의 항복이 진심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들을 인질로 보낸 셈이다.
 
남생은 연개소문의 맏아들로서 665년 10월 무렵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태막리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다. 명목상 최고 통치자에 불과한 보장왕을 넘어서 실제로 최고 집권자라고 할 수 있는 남생이 왜 이렇게 당 투항에 목을 매고 있었을까? 도대체 고구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된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자.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맡고 여러 성에 나아가 순행하면서, 그의 동생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동생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하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두 동생은 처음에 이를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알리기를 "두 동생은 형이 돌아와 그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들이지 않으려 합니다"고 하였다. 남생이 몰래 친한 사람을 보내 평양에 가서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붙잡았다. 이에 왕명으로 남생을 불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병력을 내어 그를 토벌하니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國內城)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 <삼국사기> 기록은 중국 역사서에 전해지는 기사에 의거한 내용이다. 위 기록대로라면 남생이 지방을 순행 중인 동안에 평양에 남아 있는 남건과 남산 두 동생과 서로 의심을 품고 배신하여 국내성으로 쫓겨나 처지가 곤란해지자 결국 당에 투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적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남생 형제들이 왜 서로 갈라서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부터 형제간에 불화가 적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 근거의 하나로 <일본서기>의 다음 기사를 주목한다.
 
고려의 대신(大臣) 개금(蓋金·연개소문)이 그 나라에서 죽었다.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들은 화합하기를 고기와 물과 같이하고 작위(爵位)를 다투지 말라.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웃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연개소문이 죽으면서까지 형제간에 서로 다투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로 장차 분란이 있어날 개연성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 유언은 세 형제에게 권력을 나누어주면서 화합을 강조하는 유언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만약에 형제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으리라 예상했으면서도 단지 한마디 말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연개소문이야말로 고구려 멸망의 실질적인 주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멸망의 책임에서 연개소문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사실 평소부터 남생이 동생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남생이 동생들에게 평양성을 맡기고 지방 순행에 나설 까닭이 없다. 오히려 동생들을 지방으로 내보내고 자신이 평양에 남아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본다. 그리고 <신당서> 천남생전에 의하면 남건 등이 일종의 정변을 일으키면서 평양에 남아 있는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였다고 했는데, 만약 남생이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다면 이처럼 아들을 평양에 남겨놓았을 리도 없을 것이다.
 
남생 형제간의 불화는 처음부터 그랬다기보다는 위 <삼국사기> 기사대로 형제간에 분란을 일으키는 주변 인물들의 참소 때문으로 보인다. 비슷한 내용이 <일본서기>에도 전하고 있다. 즉 "고려의 대형(大兄) 남생이 (평양)성을 나와 나라를 순행하였다. 이때 성안의 두 동생이 옆에서 도와주던 사대부(士大夫)들의 못된 말을 듣고 가로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남생이 당나라로 도망하여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기를 도모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남산과 남건의 주변에서 분란을 일으킨 사대부의 존재를 거론하고 있는 점을 보면 남생 형제가 분열하게 된 이유가 당시 이웃나라에 널리 알려졌던 모양이다. 따라서 중국 측 기록이나 일본 측 기록의 공통된 내용을 볼 때 남생 형제의 주변 인물들이 불화의 주된 이유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이들을 단지 참소를 일삼는 소인배들로만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연개소문으로부터 남생 등 아들들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때를 틈타 형제간의 불화를 조성해서 연씨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는 퇴출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정치세력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의 움직임 역시 장기간에 걸쳐 연개소문의 권력 독점이 불러온 폐해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남생 형제의 불화는 곧 중앙 정치세력 내부의 분열을 뜻한다.
 
둘째, 왜 남생이 지방으로 새삼스레 순행를 갈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동생들에게 쫓긴 남생이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은 것을 보면, 국내성을 포함하여 요동지역이 남생 순행의 주요 대상이었다고 짐작된다. 전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연개소문의 집권기에도 중앙권력이 요동지방의 성주들에게 충분히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수, 당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지방 성주들의 독자적 세력기반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잠시 중앙 권력의 공백 내지 이행기에는 더욱더 이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남생은 이들과의 정치적 타협 혹은 이들의 불만 등을 무마하기 위해 순행길에 나서게 되었다고 짐작된다.
 
고자(高慈)묘지명 : 묘지명의 주인공 고자의 아버지 고문(高文)은 고구려가 망할 것을 예상하고 형제를 데리고 당에 귀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셋째, 평양성에서 남생을 축출한 동생들과 대결하기 위해 남생이 손을 잡으려고 선택한 대상이 국내성 세력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국내성 지역의 정치세력이 평소에도 평양의 중앙권력과 대립적 분위기가 두드러졌음을 시사한다. 평양 천도 이전 오랫동안 수도였던 국내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귀족세력들의 주요한 세력기반이었으며, 평양성, 한성과 더불어 3경의 하나였다.
 
평양 천도 이후 국내성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귀족세력들은 평양성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세력들과는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양원왕 때에는 환도성간 주리(朱理)가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들의 이러한 정치적 향배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에 중앙정계에서 소외되면서 더 두드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남생이 국내성을 들어 당에 투항한다고 할 때, 이를 단지 남생만의 입장이라고 볼 수 없다. 당시 남생이 국내성 세력을 좌지우지할 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생이 국내성 세력에 의탁하는 형세였을 것이다. 따라서 남생의 투항은 아마도 국내성에 근거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근래에 발견되는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명 중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이미 당에 투항한 귀족 가문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아마 이들 대부분이 이때 남생과 함께 투항한 세력들로 짐작한다.
 
이러한 국내성 일대 귀족세력들의 움직임은 고구려 사회의 분열이 단지 남생 형제의 분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국내성을 포함하여 지방 귀족사회 저류에 이런 갈등과 분열의 징후가 넓게 깔려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중앙권력을 독점하면서 폐쇄적인 정치운영을 지속해간 연개소문이 남긴 심각한 병폐의 하나였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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