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daum.net/v/20210304164804471
연개소문은 언제 사망하였나?
고구려사 명장면 118
임기환 2021. 3. 4. 16:48
666년 정월 당 고종의 태산 봉선 의례에 고구려 태자 복남이 참여한 것은 고구려와 당 사이 관계가 이제까지 적대적·군사적 대결에서 상호 우호적인 관계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런 두 나라 사이의 돌연한 변화는 사실 당에서 시작됐다.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 고종은 재위 10년 차부터 대외관계에서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658년에 서방 서돌궐을 궤멸시켰으며, 660년에는 동방의 백제를 멸망시켰고, 663년에는 북방의 철륵도 제압했다. 661~662년의 평양성 원정만이 참패했던 것이다. 645년 당 태종의 친정을 포함해 두 차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원정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당은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럴 바에야 다른 주변 국가와 더불어 차라리 봉선 의례에 참여시킴으로써 관념적·의례적으로나마 고구려를 당의 복속국 위상을 확인하는 정책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봉선 의례는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가 천하를 통일해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음을 공표하는 의례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당 고종의 봉선 의례에 고구려가 참여한다는 것은 고구려가 복속하여 천하의 평화가 실현되었다는 뜻을 갖는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고구려의 의례적 복속을 대가로 고구려와 평화적 외교 관계를 맺겠다는 뜻이다.
아마도 당은 고구려에 이런 뜻을 전하는 사신을 직접 파견했거나 아니면 다른 주변 국가를 통해 우회적으로 당의 입장을 고구려에 전달했을 것이다. 봉선 의례의 조서가 664년 7월에 반포됐고, 665년 9월 당이 왜(倭)에 사절을 파견한 사례를 보면, 대략 이 무렵에 고구려에도 당의 입장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태자 복남이 665년 10월 낙양에 도착했으니, 늦어도 8월께에는 평양에서 출발했을 터이다. 따라서 대략 664년 9월~665년 8월에 고구려에서는 당의 태산 봉선에 참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의가 벌어졌으리라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이 봉선 의례에 고구려 왕을 대신하는 상징적 위상을 갖는 태자(太子)가 참여했다는 점은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오래 지속하겠다는 고구려 측의 적극적 의도로 읽힌다. 고구려 태자가 사절로 참석했다는 사실은 당 고종으로서도 매우 흡족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양국 사이의 획기적인 관계 개선을 위해 사전에 태자급 인물을 사절로 파견하는 문제가 논의됐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666년 정월 당 고종의 태산 봉선 의례에 고구려 태자가 참석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두 나라 사이의 적대적 관계에서 우호적 관계로 변화시키는 외교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고구려 내부에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중대한 정치적 결정은 과연 누가 내렸을까?
642년 쿠데타 이후 내내 중앙정권을 장악한 인물이 연개소문이었으니, 우선 연개소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무렵 과연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에 대해 여러 역사서의 기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에 대해서는 현재 사료상으로 664년, 665년, 666년 세 가지 설이 있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 측 자료에는 666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는 다른 전승 없이 중국 측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664년 10월에 연개소문이 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의하면 남생이 32세인 665년에 태막리지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이 연개소문의 사망을 직접 보여주는 내용은 아니지만, 연개소문의 사망에 따라 장남인 남생이 태막리지를 승계한 것으로 보면, 665년이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가 된다.
이처럼 세 계통의 자료가 모두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달리하고 있는데, 고구려 최고 집권자였던 만큼 연개소문의 죽음이 미칠 영향을 고려해 그의 사망이 일정 기간 비밀에 붙여져 당에 뒤늦게 알려졌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남생이 32세인 665년에 태막리지에 오른 기록을 감안하면, 666년 5월로 전하는 중국 측 기록은 아무래도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물론 연개소문이 어떤 이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어서 먼저 남생에게 태막리지를 물려주었고, 이듬해 666년 5월 사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664년 10월에 연개소문의 사망 소식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일본서기' 기사가 아무래도 걸린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664년 10월에 사망하고 어떤 이유로 일정 기간이 지난 후인 665년에 남생이 부직을 승계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런 설명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일본서기' 기사 중 고구려 관련 기사가 1년의 시차가 있는 몇몇 기사 사례를 고려하건대,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를 1년 뒤인 665년으로 보고, 사망 월은 10월을 그대로 인정해 665년 10월에 연개소문이 사망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천남생묘지'의 기록도 함께 충족하고 있어 가장 유력하다고 보겠다.
사실 고구려 태자 복남이 665년 10월에 당 고종을 만났는데, 이때 이미 연개소문이 사망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이런 사실을 계속 감추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복남이 8월께 출발했으니 이때까지는 연개소문이 살아 있었고, 이후 10월에 사망해 태자 복남으로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연개소문의 사망 연월은 665년 10월로 봄이 가장 타당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SBS 역사드라마 `연개소문` 2006년 7월~2007년 6월에 100부작으로 방영되었다.
이런 추론이 타당하다면, 태자 복남이 태산 봉선 의례에 참석하게 된 데에는 연개소문의 의사가 깊이 반영됐다고 보겠다. 물론 연개소문의 사망 시기를 664년 10월 혹은 665년 8월 이전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태자 복남의 파견을 결정한 주체로 남생을 거론하기도 하고, 혹은 연개소문의 사망을 계기로 실권을 회복하려는 보장왕에 주목하기도 한다. 또는 보장왕과 남생의 합작품으로 보는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물론 정황 추론일 뿐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견해는 아니다. 하긴 필자의 추정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다만 연개소문의 사망으로 보장왕의 입지가 확장됐을 가능성은 그닥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다음 회에 살펴보겠지만 연개소문의 아들 간 분쟁이나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보장왕의 존재감은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자 복남이 파견됐다고 해서 이를 보장왕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봉선 의례에 참석하는 고구려 측 사절로서 태자라는 인물이 외교 관계의 변화를 꾀하는 고구려와 당의 입장에서 볼 때 명목상으로 가장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태자의 봉선 참여에 적극적인 의지든, 아니면 소극적인 동의든 간에 연개소문의 입장이 반영됐다고 한다면, 연개소문은 왜 당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던 것일까? 그동안 연개소문이 대당 강경파였다는 주장이 유력하지만, 사실 연개소문은 집권 초에는 대당 유화책을 꾀하였다. 당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돌아선 것은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의 명분으로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꼭 집어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662년까지 당은 고구려에 대해 군사적 공격을 지속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싫든 좋든 당에 강경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연개소문이 대당 강경파가 아니라 당 태종과 당 고종이 대고구려 강경파였던 것이다.
645년 당 태종의 친정에 의한 대대적인 침공 이후에도 요동 지역은 당군의 간헐적인 침공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661~662년에는 수도 평양성까지 8개월여 동안 당군에 포위되기까지 했다. 비록 모두 당군을 격퇴했지만, 지속되는 전쟁에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일반 백성은 물론 지배 세력들도 전쟁의 피로도가 높아졌을 것이고, 이는 연개소문의 집권 기반을 불안정하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자식에게 정권을 물려주어야 할 시점이었기에 당과의 긴장 관계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개소문으로서도 당 측의 유화적인 제안을 거절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고 보인다.
이렇게 고구려 태자 복남의 태산 봉선 의례 참여는 고구려와 당의 새로운 관계 개선의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고구려 내부 정세를 보면 자식에게 정권의 안정적인 이양을 위한 연개소문의 정치적 판단이 주요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665년 10월, 연개소문은 장남인 남생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음을 맞았다. 태산 봉선의 결과를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집권 시기 내내 당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던 연개소문으로서는 당의 유화적인 태도 변화에 다소 편안하게 눈을 감았을 게다.
그런데 666년 6월에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 당에 투항을 요청하는 사신이 당의 조정에 도착했다.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포기하고 유화책으로 돌아섰던 당 고종으로서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셈이다. 그새 고구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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