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1211150315615


연개소문은 가문에 국가를 종속시켰다

[고구려사 명장면 112] 

임기환 입력 2020. 12. 11. 15:03 


645년 당 태종의 침공이 시작되어 대외적 위기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인해 일어난 고구려 내부의 권력투쟁은 일단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이 처음에는 당과 온건한 대외 정책을 모색하다가 당 태종이 자신의 정변을 치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자 대당 강경책으로 돌아선 데에는 당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게다. 또한 전쟁 전체를 중앙에서 지휘하면서 통솔력을 발휘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것이고, 전쟁 과정에서 요동 지방 군사력이 소실되면 자연스레 안시성주 등 그의 정적들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 과정에서 연개소문 자신이나 중앙정권의 통솔력은 그다지 발휘되지 못하였고, 또 안시성을 구원하러 파견한 중앙군 역시 단숨에 궤멸되면서 결과적으로 전쟁 과정에서 중앙정부가 한 역할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따라서 645년 전쟁 후 오히려 안시성주 등 요동 지방 성주들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결과가 되었으니, 연개소문이 애초에 기대했던 자신의 주도권 장악은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당의 공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지방세력 역시 중앙정부와 다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렇게 최소한 안시성주로 대표되는 반(反)연개소문 지방세력과 연개소문이 이끄는 중앙정권은 이런 식으로 갈등을 미봉하고 서로 균형을 유지해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아예 중앙정권을 장악하는 데에만 골몰한 듯하다. 정변 시에 100명이 넘는 대신을 처형한 뒤라서 원로와 장년의 인물들이 배제된 연소자들 중심으로 정권을 운영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나마 점점 자신의 가문에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가뜩이나 좁은 인재 풀을 더 축소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애초에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뚜렷한 명분 없이 단지 자기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더욱 사적 권력 기반의 강화에 주력한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 멸망의 징후들을 시사하는 여러 사건이나 재이(災異) 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보장왕 9년에 승려 보덕은 백제로 망명하였는데, 이 무렵 연개소문이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를 억압하면서 자신의 집권 기반을 강화해 갔음을 시사한다. 또 보장왕 13년에는 마령에 신인(神人)의 출현하여 "너희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汝君臣奢侈無度 敗亡無日)"고 경고하였다는 기사도 주목된다. 고구려 말기에 그 멸망을 예언하는 참언이 유행하였음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만, 위 마령 신인의 출현은 연대기 기사라는 점에서 이 무렵에 정치적 정세 변화가 심각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볼 때, 연개소문이 더욱더 사적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보장왕 10년을 전후한 무렵부터로 본격화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아마 이 무렵부터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새로운 집권적 관직을 만들어 취임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후기 정치 운영에서 최고 관등인 대대로는 3년을 임기로 교체 혹은 연임하면서 유력 정치세력들의 합의를 통한 귀족연합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에도 이러한 운영 방식은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이는데, 태대대로라는 관직은 연개소문이 자신의 집권력을 계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종신직으로 신설한 관으로 추정된다.


물론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에 올랐던 시점이 언제인지는 불확실하다. 정변 직후에는 같은 성씨인 인물을 대대로로 내세웠지만, 점차 자신의 집권력이 안정되면서 기왕의 임기제인 대대로 대신에 종신직인 태대대로를 신설하여 취임하였던 것이다. 태대대로의 취임 시기는 대략 자신의 가문으로 권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하는 651년 무렵이 아닐까 싶다. 연개소문이 태대대로라는 초월적인 권위를 갖는 관직을 신설하여 취임한 자체가 지금까지의 귀족연합적인 정치 운영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나마 중앙정권에 참여하였던 다수 귀족 가문들의 커다란 불만을 초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천남생묘지명 / 사진= 바이두


게다가 연개소문은 노골적으로 아들 남생, 남산 등에게 핵심 요직을 맡기면서 권력을 자신의 가문에 집중시켰다. '천남생묘지'와 '천남산묘지'를 보면 651년(보장왕 10년)에 남생이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에 취임하고, 5년 뒤 23세 때에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는데, 이때 동생 남산은 18세로 대형(중리대형)이 되었다. 다시 661년에 남생은 28세로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에, 남산은 23세로 중리위두대형 및 중군주활(中軍主活) 장군직에 올랐다. 이렇게 남생의 뒤를 이어 다섯 살 차이인 동생 남산이 형의 뒤를 이어 관직을 이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둘째 아들 남건의 경우 묘지명이 없어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남건은 남생보다는 하위, 남산보다는 상위의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661년 9월에 당군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남생이 수만군을 이끌고 당의 장수 글필하력의 군대와 대결한 압록강 전투에서 3만명이 패몰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남생묘지명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때 남생이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라는 관직으로 고구려군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능력이 갖추지 못한 남생이 아버지의 후광으로 최고 사령관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3만 대군을 잃는 패배를 당하였던 것이다.


'신당서' 천남생전을 보면 남생이 제7위에 불과한 중리대형으로서 '국정을 맡아 모든 사령을 주관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소 과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18세 남생이 이런 식으로 국정을 농단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20대 중·후반 나이로 최고 요직을 차지하였으니, 연개소문 한 가문에 의해 중앙권력이 농단되고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어쨌든 연개소문 가문에 의한 권력의 집중은 651년에 시작하여 661년에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간 듯하다.


이렇게 정국 운영의 통로가 폐쇄되어 가면서 정변 초기부터 연개소문 정권에 참여하였던 정치세력들조차 소외되어 갔을 터이고, 이런 불만은 대외적 위기 속에서 그 모순을 심각하게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 아들들이 국가운영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해서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위험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언이 있다. 이 말에 해당되는 사례는 역사상 무수하지만, 연개소문의 정변과 권력 운영이야말로 꼭 들어맞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그런 권력의 부패가 한때의 잘못으로 그치지 않고, 국가적 위기와 함께 나타났다는 점이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가문에 고구려 국가를 종속시켰다. 그리고 수많은 고구려인의 불행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