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3587724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 남단덕(南單德) 묘지명(墓誌銘)에 대한 연구
김영관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17.08
백제문화 57권 193-222(30pages)
초록
남단덕 묘지명은 2010년 중국 산시성 시안시/섬서성 서안시(陝西省 西安市) 동쪽 바이루위안/백록원(白鹿原)에서 출토되었고, 현재는 시안베이린/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명은 개석(蓋石)은 결실(缺失)되었고 지석(誌石)만 남아있다. 크기는 가로 44.4cm, 세로 43.5cm로 정방형에 가까우며, 두께는 6.8~7.5cm 정도이다.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가로 24행, 세로 25행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을 한 후, 그 안에 총 533자의 지문을 새겨 넣었다. 당 태종(唐 代宗)때인 776년에 만들어졌다.
남단덕의 선조는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편적되었고, 조부(祖父)인 남적(南狄)은 마미주 도독(磨米州 都督)을 지냈고, 부친인 남우(南于)는 귀주자사(歸州刺史)를 지내는 등 당에서 지방관으로 활동하였다.
* 편적 : 호적에 편입하거나 호적을 편성함
남단덕은 남우(南于)의 맏아들로 고구려 멸망 이후인 699년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平壤)에서 태어났고, 요동(遼東)에서 성장했으며, 현종 개원(玄宗開元)초년 (713)에 발탁되어 주로 변방의 무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다 현종 천보(天寶)14년(755)에 안록산(安祿山)이 일으킨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투항하였다. 그 후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살다가 776년 향년 78세로 생을 마쳤고 백록원에 묻혔다.
남단덕 묘지명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와 고구려 유민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고구려인의 입당 이후 활동뿐만 아니라 입당 이전 고구려의 지명과 관제 등에 대한 새로운 자료이기도하다. 또한 당의 고구려 고토 지배정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하였고,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과 안동도호부에 대하여도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차원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남단덕 묘지명의 발견으로 고구려인으로는 최초로 남씨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당의 안동도호부를 비롯한 고구려 고토지배정책과 고구려 유민에 대한 처우나 활용 등에 대해 새로운 연구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 유민이 당에 들어가 지방관으로 활동하다가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가 다시 황제에 귀부하는 등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던 기록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설인귀(薛仁貴)의 증손자인 설기(薛夔)가 묘주인 남단덕의 묘지명을 작성하는 등 고구려 유민들이 당에 들어가 장안의 귀족 가문들과 직접 교류한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남단덕 묘지명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중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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