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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무 (高延武)
 
 
[고구려사 명장면 130] 고구려 부흥전쟁 (3) 고연무와 오골성 전투 - 매경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 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켰다."
 
이 기사는 이른바 나당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설오유가 이끄는 1만명 신라군과 고연무가 이끄는 1만명 고구려군이 합동으로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까지 진격해 당군과 충돌하였다. 어제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신라군과 당군이 충돌하고, 어제까지 적국이었던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으니, 이 전투는 이제까지의 동맹-적대 관계의 판도가 뒤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략)
 
당군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부흥전쟁의 불길을 당기려는 고연무와 고구려군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참 등 신라군의 후원 없이는 더 이상의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고연무와 고구려군 정예병 1만명 군대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위 기사에서 고연무는 고구려 태대형 벼슬이다. 태대형은 제2위의 관등으로 최고위 자리다. 태대형 벼슬이 고구려 멸망 전부터 갖고 있던 관등인지, 아니면 고구려 멸망 이후 부흥군을 이끌면서 갖게 된 것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고연무가 고구려에서 상당한 정치적 비중을 갖고 있던 인물임은 틀림없다. 고연무가 거느린 1만 군대는 정예병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여기저기 흩어진 고구려 잔병들을 모았다기 보다는 애초부터 고연무가 거느린 병력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연무와 1만 고구려군도 안승과 4천여 호가 신라로 망명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신라로 투항한 경우가 아닌가 짐작된다.
 
고연무의 고구려군과 설오유의 신라군이 별다른 충돌 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한 것으로 보면, 이때에 이미 한반도 서북부 일대는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당의 안동도호부마저 신성으로 옮긴 뒤이기 때문에 공백 지대나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은 고구려에 대한 트라우마로 아예 평양 일대를 텅 비워서 부흥의 싹을 없애려고 했지만, 남아 있는 고구려인들은 그 공백 지대에 다시 고구려 부흥의 의지를 심고자 했다. 그 하나가 바로 고연무와 1만 고구려군에 의한 오골성 전투이다.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 670년 03월 ) - 한국사DB
삼국사기 > 권 제6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註 001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註 002 고연무(高延武)註 003와 더불어 각각 정예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註 004 옥골(屋骨)註 005에 이르렀다.註 006 ▨▨▨ 말갈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註 007에 이르러 그들을 기다렸다.

 
註 003
고연무(高延武): 고구려가 멸망한 뒤 문무왕 10년(670)에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을 넘어 말갈 병사와 싸워 승리하였다. 문무왕 20년(680)에는 보덕국(報德國)의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으로서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왕의 조카를 보덕국왕 안승(安勝)의 왕비로 맞게 해준 답례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안승(安勝) 휘하의 장수로 보아 왔으나, 원래 한성(漢城) 지역에 기반한 독자 세력이었다가 뒤에 남하한 안승과 검모작 세력과 결합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이정빈, 2009,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 현실』 72, 한국역사연구회, 140~148쪽).
 
 
 
 
설오유와 고연무가 크게 승리하다 ( 670년 04월 04일 ) - 한국사DB
한국사DB > 삼국사기 > 권 제6 신라본기 제6 > 문무왕(文武王) > 설오유와 고연무가 크게 승리하다
 
〔10년(670)〕 여름 4월 4일에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워 우리 병사가 크게 이겼다. 목 베어 죽이고 사로잡은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당나라 병사가 이어서 도착하자, 우리 군대는 물러나 백성(白城)註 001을 지켰다.
 
 
 
 
보덕왕 안승이 혼인에 대해 감사하다 ( 680년 05월 ) - 한국사DB
한국사DB > 삼국사기 > 권 제7신라본기 제7  > 문무왕(文武王) > 보덕왕 안승이 혼인에 대해 감사하다
 
여름 5월에 고구려의 왕이 대장군(大將軍)註 001 연무(延武)註 002 등을 시켜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安勝)은 말씀을 드립니다. 대아찬(大阿湌) 김관장(金官長)註 003이 이르러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표하고 아울러 생질로 제 안주인을 삼으라는註 004 교서(敎書)를 내리셨습니다. 이어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서로 마음속에 있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요임금〕가 딸을 규(嬀)에게 시집보내고註 005, 〔주〕왕의 딸을 제(齊)나라에 가게 한 것은[王姬適齊],註 006 본래 신성한 덕을 드러내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무리로 행동과 능력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행히 좋은 운수를 만나서 성인의 교화에 몸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매번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고자 해도 길이 없습니다. 거듭 대왕의 사랑을 입어 이렇게 인척이 되는 은총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나타내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갖추어, 좋은 달 좋은 때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 동안에도 만나기 힘든 일을 하루아침에 얻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처음에 바라지 못했던 것이고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그러한 은혜를 받겠습니까? 선조(先祖) 이하가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신은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직접 알현하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과 즐거움은 맡길 곳이 없어서, 삼가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註 007 연무를 보내 표문을 올려 아룁니다.”
 
 
註) 002
연무(延武): 고구려의 장군인 고연무(高延武)를 말하는데,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문무왕 10년(670)에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당(唐)이 장악하고 있던 오골성(烏骨城)을 공격하였다. 그 뒤 보덕국(報德國)의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으로 문무왕 20년(680)에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왕의 조카를 보덕국왕 안승(安勝)의 왕비로 맞게 해준 답례의 편지를 전하였다. 670년 오골성전투 당시 고연무의 지위를 ‘고구려 태대형’이라고 밝힌 점에서 신라로 귀순하였던 연정토(淵淨土)와는 구분되는 인물이다. 연정토는 고구려의 관등 없이 귀신(貴臣) 혹은 대신(大臣)이라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형식적이나마 고구려 부흥국가를 표방하였던 보덕국 소속의 관인(官人)들은 고구려의 관등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하여 볼 때 ‘고구려 태대형’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신라로 귀순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이정빈, 2009,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 『역사와현실』 72, 135~136쪽). 고연무는 670년 신라와의 연합작전 수행 이후에도 보덕국의 일원으로 군사 문제를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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