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3764

중종도 놀라게 한 조광조의 '황당 제안'
[참모열전 15회 : 조광조 2부] 혁명 꿈꾸다 개혁파 된 조광조
14.03.28 20:40 l 최종 업데이트 14.03.28 21:51 l 김종성(qqqkim2000) 

     [1부] 급진적이었지만, 현실적인 목표 갖고 개혁 추진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3
     [2부] 혁명 꿈꾸다 개혁파 된 조광조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2
     [3부] 불도저 조광조의 전성기와 쇠락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1
     [4부] 조광조, 참모였기 때문에 실패했다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0 
 

▲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 정약용을 기념하는 다산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소재. ⓒ 김종성
 
16세기 초반을 장식한 불세출의 개혁가이자 중종의 참모인 정암 조광조. 그는 조선이 세워진 지 90년 뒤인 1482년에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명문가였다. 출생지는 지금의 서울 종로 낙원상가 바로 옆이다. 오늘날, 낙원상가 옆에는 조광조의 생가 터를 알려주는 표지가 있다. 

조광조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부를 잘했다. 말도 잘했다. 하지만 화려한 언변은 경계했다. 화려한 문장도 경멸했다. 또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재주도 탁월했다. 

조광조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나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했다. 또 겉보기와 달리 매우 현실적이고 융통성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참을성이 강하고 항상 큰 것을 노렸다. 

조광조는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원칙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윗사람일지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비판을 가했다. 

스승 앞에 두고 '군자'를 논한 조광조

그가 열일곱 살 때였다. 그의 문집인 <정암선생문집>에 따르면, 한 번은 스승인 김굉필이 연로한 어머니에게 드릴 목적으로 꿩의 털을 뽑고 내장을 꺼내서 햇볕에 말렸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꿩고기를 물고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김굉필은 여자 노비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제대로 안 지키고 뭐했냐는 것이었다. 어찌나 심하게 야단을 치는지, 여자 노비가 땅바닥에 꿇어앉은 채 대꾸도 못하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지켜보는 제자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경우, 보통 학생 같았으면 스승이 없는 자리에서 "우리 선생님은 성격이 괴팍해"라며 흉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달랐다. 김굉필이 여자 노비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현장에서 김굉필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 

"선생님께서 노모를 위하시는 정성은 간절하지만, 그래도 군자는 말을 신중히 해야 합니다." 

열일곱 살 된 학생이 스승에게 '군자답게 말을 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다행히, 김굉필은 제자의 충고를 겸손하게 수용했다. 조광조가 훌륭한 스승을 뒀던 것이다. 

이런 기질은 조광조가 훗날 중종의 참모가 됐을 때도 나타났다. 이것은 조광조와 중종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요인 중 하나다. 중종은 김굉필처럼 큰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이 이야기는 참모열전 조광조 제4부에서 소개할 계획이다).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던 선비


▲  의금부 터. 서울 종각역 1번 출구에 있다. ⓒ 김종성

조광조는 서른네 살 때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했다. 서른네 살에 합격하는 것이 늦은 편은 아니었지만, 조광조 같은 천재가 그 나이에 급제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의 개혁파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하기보다는 학문에 매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또 연산군이 사림파(개혁파 선비들)를 지독히도 탄압했기 때문에, 당시의 선비들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그리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조광조는 과거 급제를 서두르기보다는 세상을 비판하는 데 더 치중했다.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조광조는 반체제운동에 눈길을 돌렸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왕이 된 이듬해인 1507년이었다. 당시 26세였던 조광조는 서얼들이 주도한 혁명 음모에 가담했다. 이들이 꿈꾼 것은 개혁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었다. 과거제도와 신분제도의 폐지를 추구했으니, 아주 급진적인 변혁을 꿈꿨던 것이다. 

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하급 관리인 박경과 의사인 김공저였다. 조광조는 친구·친척들과 함께 혁명 모의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 모의는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발각됐다. 조광조를 비롯한 가담자들은 줄줄이 의금부에 끌려갔다.

조광조는 주동자는 아니지만 핵심 가담자였다. 이 정도면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조광조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중종 2년 윤1월 26일 자(양력 1507년 3월 9일 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광조는 자기는 영문도 모른 채 모의 현장에 갔을 뿐이라는 식으로 진술했다.  

주모자인 박경과 김공저는 참수형을 당했지만, 조광조 본인과 친척·친구는 그냥 풀려났다. 조광조 집안이 명문가이고 친척 중에 관료가 많다는 점이 반영된 듯하다. 동지들은 사형을 받고 자신은 훈방됐으니, 그가 느낀 자책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저돌적인 개혁을 추진한 데에는 이때의 죄책감을 씻으려는 동기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상을 고치는 개혁가로 방향을 틀다

▲  성균관 기숙사.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다. ⓒ 김종성

의금부에서 호된 경험을 치른 조광조는 세상을 뒤엎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고치는 개혁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 같다. 얼마 안 있어 그는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역모사건 3년 뒤인 스물아홉 살 때 그는 과거시험 소과(小科)인 진사시험에서 장원급제했다. '9급 공무원시험'에 수석 합격한 셈이다. 

진사시험을 통과한 진사나 생원시험을 통과한 생원 중에서 실력이 좋은 사람들은 국립대학인 성균관 입학 기회를 받았다. 성균관에 들어간 진사·생원은 거기서 대과(大科) 시험을 준비했다. 진사 조광조도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다른 유생들처럼 대과시험에 매진하지 않고, 입학하자마자 성균관 개혁 캠페인에 착수했다. 

조광조가 벌인 캠페인 중 하나는 요즘 말로 하면 '바른 자세 운동'이었다. 성균관 유생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평소에도 도포와 관을 벗지 않으며 혼자 방에 있을 때에도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강의실에서든 기숙사에서든 다리를 뻗거나 누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균관에 갓 들어간 신입생이 이런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신입생 조광조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학교 분위기부터 바꾸려 하자, 성균관에서는 징계를 준비했다. 3년 전에 혁명을 모의했다가 훈방 받은 사람이 성균관에 들어와서 선배들의 휴식을 '훼방'하니 성균관 사람들도 꽤 황당했을 것이다. 이때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조정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을 정도다.

하지만 조광조는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덕분에 유생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낮에도 가끔씩 낮잠을 자던 유생들은 조광조를 무척이나 원망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광조에 대한 징계 움직임이 철회되고, 유생들은 물론이고 교원들도 조광조의 팬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5급 행정고시에 합격한 운동권 청년

조광조의 열혈 팬이 된 성균관 교원들은 조광조를 조정에 추천했다. 성균관의 추천을 받은 유생은 대과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간부급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조광조가 입학한 지 3년 뒤에 성균관은 그를 군수급인 종6품 조지서 사지에 추천했다. 조지서 사지는 종이를 만드는 관청의 수장이었다. 

조광조는 특채를 통해 관직을 받는 게 기분 나빴다. 정식으로 대과시험에 급제해서 당당하게 공직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지서 사지에 임명된 것을 무시하고 그냥 대과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조지서 사지에 특채된 게 자극제가 됐는지, 특채된 지 2개월 만에 조광조는 대과시험에 급제했다. 이때가 1515년, 그의 나이 서른네 살 때였다. 혁명을 모의했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난 운동권 청년이 8년 만에 '5급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대과에 급제하고 처음 몇 달 동안 조광조의 관직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3개월 만에 임명된 자리가 정6품 사간원 정언이다. 사간원은 지금의 감사원 같은 기구이고, 사간원 정언은 왕에게 국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리였다. 조광조는 말을 잘했다. 그래서 사간원 정언은 그에게 딱 맞는 자리였다. 

사간원 정언이 되자, 조광조는 곧바로 개혁운동에 착수했다. 어떤 조직이든지 간에 초장에 자기식으로 분위기를 바꿔놔야 직성이 풀렸던 모양이다. 사간원 신입 관료가 된 조광조는 보수파에 대한 정치공세에 착수했다. 

조광조는 사간원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과 사헌부(검찰청과 유사)의 벼슬아치 전원을 해임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광조 본인은 빼고 나머지 전원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신입 공무원이 자기 부서의 상관들은 물론이고 다른 부서의 공무원들까지 전원 숙청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사간원·사헌부는 물론이고 조정 전체가 술렁였다. 상소를 받은 중종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입 공무원인 조광조가 그런 상소를 올린 이유는 무엇인지, 이에 대해 중종은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제3부에서 계속 설명하겠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