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71271

사약 받은 조광조,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
[참모열전 14회: 조광조 1부] 급진적이었지만, 현실적인 목표 갖고 개혁 추진
14.03.23 10:55 l 최종 업데이트 14.03.23 10:55 l 김종성(qqqkim2000)

     [1부] 급진적이었지만, 현실적인 목표 갖고 개혁 추진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3
     [2부] 혁명 꿈꾸다 개혁파 된 조광조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2
     [3부] 불도저 조광조의 전성기와 쇠락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1
     [4부] 조광조, 참모였기 때문에 실패했다 - 오마이뉴스  http://tadream.tistory.com/11150 



▲  조광조의 영정.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중종의 참모였다가 사약을 마시고 쓰러진 비극의 정치인, 조광조(1482~1519년).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그는 사약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비참한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광조를 현실과 괴리된 개혁가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인식에는 근거가 별로 없다. 신속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벌였다가 실패한 인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현실과 괴리된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뿐이다. 물론 이런 선입견에 근거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이나 말은 항상 고매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른네 살 나이로 응시한 1515년 알성시(임금의 성균관 방문을 기념하는 과거시험)에서 제출한 답안지는 "하늘과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 임금과 백성도 근본적으로 하나이므로, 왕도(王道)가 백성들에게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왕도 즉 임금의 도리가 정치개혁의 출발점이라는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좀 추상적인 이야기로 비칠 수도 있는 글이다. 

옛 선비들이 툭하면 요순시대를 언급한 이유

또 조광조의 말이나 글에서는 고대 중국의 요임금·순임금 시대(요순시대)가 유난히 강조되었다. 요순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알려진 시기다. 그 시대에 정말 그렇게 완벽한 선정이 펼쳐졌는지는 실증할 수 없지만,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요순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칭송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를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조광조를 비롯한 옛날 선비들의 화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혁명이나 개혁을 언급할 때에 영국혁명·프랑스대혁명·미국독립혁명을 준거로 삼는 예가 많듯이, 옛날 선비들은 진보파건 보수파건 간에 정치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추상적인 관념이나 요순시대를 들먹이곤 했다. 

특히 요순시대를 자주 거론한 것은, 그것을 통해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요순시대는 누구나 다 동경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자주 거론하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요순시대를 복원하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요순시대를 언급하고 나서 결론에 가서 현실적인 주장을 내놓는 것이 옛날 선비들의 화법이었다.  

예컨대, 보수파에 속한 선비 출신 관료들 중에는 요순시대의 평화를 장황하게 칭송한 다음에 결론에서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잠시 미루어야 한다"는 식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았다. 조광조가 툭하면 요순시대를 거론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자기주장에 대한 공감대를 얻고자 선비들의 일반 화법을 따랐을 뿐이다. 

개혁파 선비들의 관직 진출을 노골적으로 지원


▲  조광조의 생가 터.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옆에 있다. 사진 왼쪽에 천도교 회관이 보인다. ⓒ 김종성

조광조를 현실과 동떨어진 개혁가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너무나 급진적인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가 추진한 개혁의 속도가 좀 빨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매우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조광조는 이른바 정국공신 개정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정변인 중종반정에 참여한 국가유공자 중에서 가짜 유공자들을 골라내자는 것이었다. 가짜 공신들을 골라내고 그들이 포상으로 받은 땅과 노비를 빼앗자는 것이 이 운동의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조광조가 이 운동을 벌인 진짜 목적은 진짜 유공자와 가짜 유공자를 솎아내는 게 아니라, 중종 정권에 포진한 보수파의 지위와 경제력을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운동을 통해 조광조는 보수파 정치인 76명의 지위와 재산을 환수하는 데 성공했다. 개혁을 성사시키자면 개혁 대상의 밥줄부터 끊어놓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광조는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시험 제도도 내놓았다. 현량과 제도 하에서는 중앙과 지방에서 추천받은 사람만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집권세력인 조광조 집단과 인연이 없는 선비들은 추천을 받기가 힘들었다. 

이로 인해 조광조 세력과 가까운 선비들이 더 많은 응시 기회를 가지고 더 많이 합격할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가 노골적으로 이런 제도를 만든 것은, 기존 제도 하에서는 개혁적 선비들을 중앙 정계에 불러들일 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구세력의 경제력을 빼앗고 개혁파 선비들의 관직 진출을 노골적으로 지원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광조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다. 개혁의 속도가 빨랐던 탓에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를 갖고 개혁을 추진했다. 

전체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세상 꿈꾼 조광조


▲  조광조의 위패가 모셔진 도봉서원. 도봉산에 있다. ⓒ 김종성

조광조가 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은 시대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이다. 그가 정권을 잡기 전에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이른바 훈구파라 불리는 세력이었다. 훈구파는 말 그대로 하면 '공훈을 세운 구세력'이다. 쿠데타나 정변에서 공로를 세워 집권층을 형성한 세력을 뜻한다.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변을 통해 권력 핵심부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국가 시스템이 그만큼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1392년 조선 건국 이후부터 1515년 조광조의 등장 이전까지 조선을 지배한 세력은 기본적으로 훈구파이거나 이와 유사한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반(反)역사성은, 그들이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실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주로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포진한 이들은 대토지 소유를 통해 경제력을 독점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치권력을 이용해서 대기업을 소유하고 대규모 부동산을 보유했던 것이다. 농업경제 하에서 농토와 노비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지금의 대기업 주인과 같은 존재였다.  

훈구파의 정치적·경제적 독점은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했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반에 재야에서는 홍길동의 반란 같은 반체제 운동이 나타나고, 조정에서는 사림파로 불리는 개혁세력이 두각을 보였다. 이것은 조선 사회의 양극화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훈구파가 나라를 망쳐 놓았기 때문에 재야와 야당 세력이 도전장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일기>나 <중종실록>에 묘사된 홍길동의 반란은 크나큰 여파를 남기기는 했지만 조선 왕조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홍길동의 반란이 진압된 1500년 이후에 훈구파의 대항마로 남은 것은 야당세력인 사림파뿐이었다. 하지만, 사림파도 연산군 시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연산군이 무오사화·갑자사화 같은 정변을 일으켜 사림파를 집중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연산군의 행동은 결국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훈구파를 견제할 사림파가 약해지자 훈구파의 힘이 더 세졌고, 권력의 균형이 깨진 틈을 타서 훈구파는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훈구파는 사림파가 약해진 정치환경 속에서 한층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 조광조 등장 이전의 상황이었다. 재야의 반체제 세력도 약해지고 야권의 개혁세력도 약해진 상태에서 역사무대에 전격적으로 출현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분명했다.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선을 정상적인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특권층만 잘사는 세상이 아닌, 전체 백성이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재야와 제도권의 비판세력이 취약한 상태에서 거대 여당인 훈구파에 맞서자면, 정상적이고 순차적인 방법으로는 개혁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노골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광조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종의 참모가 되어 정치개혁에 도전한다. 이어지는 제2부에서는 조광조가 중종의 참모가 되는 과정, 제3부에서는 개혁을 추진한 구체적 과정, 제4부에서는 실패한 이유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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