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518153600334


[취재파일] 잘 나갈 땐 '나의 기업', 어려울 땐 '국가의 기업'..그들에게 '염치(廉恥)'를 묻는다

한세현 기자 입력 2020.05.18. 15:36 수정 2020.05.18. 15:36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선 어느 한 가지 요소가 아니라 건강, 금전, 출산, 육아, 교육, 노후, 사고 등 불행해질 수 있는 여러 요소를 모두 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화 생물학자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저서 '총, 균, 쇠'를 통해 이 구절을 더 선명하게 구체화합니다. 고대 야생동물이나 야생식물들이 '가축'과 '작물'로 바뀌는 데는 여러 조건이 필요했는데,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가축이나 작물이 되지 않고 야생 상태 그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흔히 성공의 원인을 특정 한 가지 요소에서 찾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실패 원인을 피할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라는 지적. 이른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입니다.


출입 기자로서 코로나19 사태로 경영 위기에 빠진 항공업계를 보고 있자면 이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 자주 떠오릅니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선 재무, 인사, 노무, 교육, 영업, 마케팅, 홍보, 대관, 안전, 보안, 정비, 신사업 발굴, 브랜드 가치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거둬야 합니다. 매일, 그것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승객을 대해야 하는 항공업은 특히 더 그럴 것입니다. 전 분야에 걸친 이른바 리스크 매니지먼트 즉, '위기관리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항공업은 애초 행복해질 집구석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행기 되돌리고, 명품 밀수하고, 외국인 가정부를 불법 고용하고, 컵 집어 던지고, 막말하고 행패 부리고 심지어 폭행까지 하고, 경영권을 두고 가족들끼리 편 갈라 싸우고, 전업주부 딸을 '임원'으로 꽂아 넣고, '기내식 대란'에 '승무원 성추행' 논란까지…. 곱씹어볼수록 다양하고 참신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 같은 경영자들에게, 모든 분야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위기관리 능력'을 바라며, 대문호와 석학의 지적을 들이대는 것이 어쩌면 애초 적합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흔히 일류는 위기에서 빛난다고 합니다. 지금이 위기입니다. 그러나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어둠 앞에 항공사 경영진들은 한없이 초라하고 또 왜소해졌습니다. 비행기가 멈추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영진의 무능'과 '참담한 성적표'였습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진에어,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국내 6개 상장사가 발표한 1분기 영업적자는 -4,226억 원에 달합니다. 이들 6개사가 불과 1년 전, 지난해 1분기 3,960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했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같은 기간 매출도 5조 9,601억 원에서 3조 9,970억 원으로, 33%(1조 9,631억 원)가량 쪼그라들었습니다.


여기에 실적을 공개하지 않는 비상장사 3곳(이스타항공, 에어서울, 플라이강원)의 영업적자까지 더하면, 국내 9개 항공사가 1분기에 기록한 영업 적자는 5,0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별로는 아시아나항공이 -2,082억 원 적자로 가장 타격이 컸고 이어 제주항공 -657억 원, 대한항공 -566억 원, 에어부산 -385억 원, 진에어 -313억 원, 티웨이항공 -223억 원 등의 순이었습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라는 불가항력적인 외부 변수가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서는 경영진들의 모습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위기를 앞에 두고 가족들끼리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또 어떤 회사는 비상경영을 선포한 날 대표이사의 두 아들이 특혜를 받고 그 회사에 입사했다는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국민과 임직원들에게 실망을 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특히, 이런 상황에서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퇴직금 등으로 65억 원에 달하는 보수를 챙겼다는 소식은 황당하다 못해 실소를 자아냅니다. 핵심 계열사인 항공사를 매각할 정도로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상법(商法) 조항을 따져보기 전에 사람으로서의 '염치(廉恥)'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삼구 회장이 책임져라"라는 해고 청소노동자들의 외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공허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앞서 세계적 투자자 워런 버핏은 "썰물이 되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지적을 빌리자면 우리 항공업계는 사실상 '누드 비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닷물 위로 화려한 선글라스에 요란한 모자만 썼지, 실제로는 수영복도 입지 않고 발가벗고 있던 셈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비행기가 멈추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다름 아닌 '경영자의 무능'과 '참담한 성적표'였습니다.



● '더 큰 어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 칠흑 같은 어둠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1분기 성적표에는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되기 전인 1월의 운항 실적 등이 포함됐습니다. 즉 최악의 상황이 모두 다 반영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2분기는 다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직격탄의 피해가 오롯이 또 노골적으로 담길 것입니다.


물론 일부 국가들이 입국 제한 조치를 완화하고, 그에 맞춰 항공사들도 국제선 운항 재개에 나설 계획입니다. 그럼에도 앞날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기본적으로, 제도적으로 해외에 갈 수 있게 되는 것과 실제 승객들이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코로나19 여파가 여전한 상황에서, 해외로 갈 수 있다고 해서 실제로 떠나는 승객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행·관광 심리가 당분간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화물과 비즈니스 승객만으로는 실적을 끌어올리기 데에 한계가 있습니다.


전체 매출 가운데 10% 미만을 차지하는 국내선도 상황을 낙관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달 30일부터 지난 5일까지 엿새 동안 황금연휴로 제주 노선을 중심으로 반짝 특수를 누리긴 했지만, 이후 불거진 '이태원 클럽 발' 코로나 재확산은 여행 수요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최대 성수기인 3분기까지 이 같은 기조가 이어진다면, 항공사들은 존립 자체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가능성도 큽니다.


● '묻지 마 지원'의 위험성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항공업계에 대한 대규모 지원에 나섰습니다. 국가 산업의 토대가 되는 '기간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금융지원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도 "항공업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산업이어서 한 번 무너지면 재건하는 것이 몹시 어렵다. 어떻게든 일단 살려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힘을 보탭니다.


그럼에도, 회사를 이 같은 위기에 빠뜨린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재 정부가 지원하는 기금은 국가재정법상의 기금이 아니어서 운용 실적을 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당연히 국회에 보고하는 장치도 없습니다. 제대로 감시나 관리·감독이 안 될 가능성이 커, 이른바 '묻지 마 지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참여연대는 등 경제 관련 시민단체들은 항공사들의 경영부실이 코로나19 이전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힘줘 지적합니다. 코로나19를 명분으로 원래 부실해진 기업에 무분별한 공적자금이 투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막대한 공적기금이 총수 일가 배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실제로 대한항공 경우, 2013년 지주회사로 인적 분할한 뒤 조원태 회장이 대주주인 한진칼에 대한항공 상표권을 부당하게 넘겼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부채비율이 800% 이상인 상황에서도 매년 300여억 원을 상표권 수수료로 지급했습니다. 사실상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행위가 부실 경영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입니다. 그렇게회사 상태를 어렵게 만들고 이제 와서 "코로나19로 피해가 막심하니 국민 혈세로 도와달라"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잘 나갈 때는 '우리 기업', 어려울 때는 '국가의 기업'"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도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줄 것인가, 아니면 70%만 줄 것인가. 이 '3조 원 쓰는 안을 두고 나라가 야단법석을 부렸는데, 국가 전체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는 기간산업 지원금 40조 원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조용한가?"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정부가 오늘의 위기만 대충 수습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옵니다.


● 생과 사의 기로, 사선(死線)에 선 항공사


이 같은 대규모 지원에도, 고정비용이 큰 항공업 특성상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지 않으면 당장 하반기까지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당장 대한항공은 정부 지원금 1조 2,000억 원에 1조 원 규모 유상증자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습니다.


모기업 한진칼은 유상증자에 참여하기 위해선 최소 2,400억 원가량의 '실탄'이 필요한데, 지난해 연결 기준 한진칼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은 1천412억 원에 불과합니다. 결국, 보유한 지분과 부동산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일으켜야 하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제값을 제때 충분히 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아시아나항공은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지난 1분 국내 항공사 가운데 가장 큰 영업적자를 낸 상황에서, 지난해 결정된 HDC현대산업개발의 인수가 다시 불투명해지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때문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고립돼 있는데, 군수 물자 공급은 물론 전쟁을 이끌어갈 장수가 누가 될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두 항공사보다 재무구조가 취약한 저비용항공사들은 말 그대로 생존을 심각하게 걱정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코로나19가 이어질 경우, 이미 이스타항공을 인수한 국내 최대 저비용항공사 제주항공은 소위 '승자의 저주'에 빠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나머지 진에어,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에어서울, 플라이강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민이 바라는 것은 '책임지는 모습'과 '제도적 안전장치'


수백만 일자리와 국가 산업의 근간인 기간산업이기에 항공업을 지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이 충분히 동의합니다. 무조건 지원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바라는 것은 경영자들의 책임지는 모습과 우리의 혈세가 제대로 또 정확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달라는 것입니다."항공업계가 겪는 위기는 비단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라는 지적을 경영자들이 아프게 받아들이기를 국민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위기의 항공업을 진단하며 "항공업계가 지원을 받되 자본 확충과 경영개선 등 종합적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한 것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미국 정부가 항공업에 보조금 250억 달러(30조 8,250억 원)를 지원하며 이 가운데 일부를 대출 돌리겠다고 한 것도 이 같은 국민 바람과 궤를 같이합니다. 블룸버그통신은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이 2008년 금융위기 때 정부가 월가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지원해주고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을 교훈 삼아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 "배차 시간을 위해 과속하기보단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이 더 중요"


어떤 일을 하면서 우리는 그 일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함께 고려합니다. 중요한 것과 그리고 서둘러야 할 것을 현명하게 적절하게 잘 고려해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긴급성을 중요성보다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가령, 버스 기사들이 운행 시간에 맞추기 위해 과속하는 것은 그 일이 긴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은 운전자 자신과 승객 모두에게 더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 항상 예기치 못한 해로움이 있습니다. 얻고 잃는 즈음에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이 일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해로움보다 더 큰 것일지를 말입니다. 만약 그런 해로움이 예상된다면 그것을 최소화하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빨리 가는 것보다 '안전하게' 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항공사가 걸어갈 길이 어떤 모습일지, 시청자 여러분의 눈높이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사진=연합뉴스)


한세현 기자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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