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8057

"국정원이 나를 사찰했다"... 어느 프랑스인의 고백
[목수정이 만난 파리의 생활좌파들⑪] 브누아 켄더(Benoit Quennedey)
14.07.02 08:19 l 최종 업데이트 14.07.02 08:33 l 목수정(anouck)

지난해 9월, 파리에서 처음 열린 위안부 수요집회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날따라 불길하게 몰려다니던 먹구름은 기어이 집회 시작과 함께 장대비를 트로카대로 광장에 내리꽂았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와 김복동 할머니의 발언에 이어 우산도 없이, 비에 흠뻑 젖은 한 프랑스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그의 발언은 상당한 밀도와 강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비바람에 시달리며 간신히 서있는 동안에도 전율이 옷 밑으로 밀려들 만큼. 저 남자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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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6월 25일, 파리 트로카 대로에서 다시 열린 위안부 수요집회에서 지지 발언 중인 브누아 켄더. ⓒ 목수정
"당신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

두 달 뒤, 박근혜의 파리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외유에 나선 부정선거 당선범의 파리 방문에 우리 식의 환영식을 준비했다.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합법적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들고. 그때 그 남자를 수소문했다. 위안부 문제에 그 정도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 핵심적인 한국의 정치사안에 무관심하지 않을 터, 집회에서 발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위안부 수요집회 주최 측을 통해 얻은 연락처로 처음 통화하면서, 그가 프랑스-한국친선협회의 부회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 들어보는 협회. 그렇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그런 협회였다.

뜻밖에도 그는 나의 청을 거절했다. "내가 그 집회에 가서 발언하면 당신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면서. "무슨 말씀이시냐. 위안부 집회 때처럼, 오셔서 생각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시면 된다"며 재차 청했지만, 결국 그는 발언하기를 거절했고 대신 조용히 참석만 했다. 우리의 에펠탑 집회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호기로운 발언, "집회 참석자들을 채증해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에 힘입어 예상을 뛰어넘는 파장을 남겼고, 브누아 켄더의 말이 기우가 아니었음은 <조선일보>에 의해 바로 입증되었다. <조선일보>는 브누아 켄더가 속한 협회의 이름을 '북한-프랑스친선협회'라고 대범하게 왜곡해가며, 이 집회가 친북세력에 의해 조직되었다고 헛소리를 지껄였던 것이다. 

국정원이 밀착방어하는 '위험집단' 프랑스-한국친선협회의 넘버2 브누아 켄더와의 첫 만남은 이처럼 본의 아니게 구질구질한 집단들이 깔아놓은 지뢰밭을 뛰어넘으며 이뤄졌다. 박근혜 당선 1주년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 지역에 동시 집회가 12월에 다시 진행되면서, 나는 브누아와 그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협회에 대해 좀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조선일보>가 뻥튀기해서 전하긴 했지만, 그들은 확실히 북한에 대한 관심을 가진 단체였다. 남한에 대한 관심도 갖고 있었다. 남한의 전교조 법외노조 판정, 철도노조 파업, 위안부 문제는 북한의 장성택·김정은 간에 벌어진 사건만큼이나 그들의 진지한 관심사였다. 심지어 세월호 사건으로 큰 희생자를 낸 안산의 단원고등학교에 위로의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왜? 이들은 저 멀고도 머리 아픈 나라 한국에 관심을 가질까? 그 흔한 케이팝팬도 아니고, 남북한의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니. 분단국가에 태어난 죄로,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심지어 행동까지 하기 시작하면 인생 꼬이기 십상인 우리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쳐도, 조상들이 일찌감치 혁명이며 파업이며 해준 덕에 제법 한가로운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 이들이 굳이 왜 이 스릴 넘치는 동네를 기웃거리는 건지! 그냥 인생이 좀 무료한가. 이렇게 치부해 버리려던 나의 머리에 확 찬물을 끼얹는 듯한 발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이 있었다. 

"왜 프랑스 한인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이나 전태일 분신을 추모하는 행사는 안 하는 걸까?" 

북한을 드나들며 통일에 마음을 쓰면서, 동시에 전태일의 추모행사도 하고 싶어 하는, 이분된 한국 진보진영의 시각으로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그의 드넓은 오지랖은, 분단 현실이 우리에게 운명지운 장애를 뼈아프게 자각 시켰다. 분단의 운명에 굴복한 이후, 우리의 삶 구석구석을 연쇄적으로 이분 시켜 버리는 이 사악한 전염병에 우리는 저항도 않고 투항해 버렸던 것은 아닌지. 한반도에서 태어날 때부터 익숙하게 작동시켜 오던 이분법의 관성에 딴지를 걸어준 이 프랑스 남자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뇌를 털어보기로 한다.  

좌파의 가치는 지식인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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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상원의회 내부에 있는 브누와 켄더의 사무실. ⓒ 목수정

브누아 켄더는 1976년 프랑스 디종(Dijon)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국립과학연구소(CNRS)에서 근무하셨다. 여유롭고 지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제3세계와의 협업이 잦았던 부모님 직업의 영향으로 가정에는 개방적인 정신이 흘렀다. 부모님은 1981년 미테랑의 사회당 집권을 좌파의 큰 승리로 받아들였던 오래된 사회당 지지자. "당신은 좌파인가?"라는 나의 첫 질문에 그는 부모님의 이력을 먼저 소개하면서 "좌파의 가치를 자연스러운 지식인의 양심으로 받아들이시는 그분들 밑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그 길로 들어섰다"고 답한다. 

중·고교 시절 내내 정치와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브누아는 고등학교 졸업 후 파리정치학교(Science-Po)에 진학했다. 불평등의 극복. 국가재정 적자를 빌미로 후퇴해가는 사회공공서비스와 그에 대한 저항이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고, 국제정치에도 흥미를 가졌다. 스무 살이던 1996년, 한 교수가 그에게 남북한 관계를 연구해보라고 제안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연히?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독일 통일 후,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분단국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치솟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니까. 마침 그가 치렀던 역사 과목의 바칼로레아에서도 '독일 통일'의 문제가 나왔던 터였다. 그때부터 그의 머리 한 켠에 '독일은 통일되었는데, 한국은 왜 아직이지? 이제 냉전시대는 끝났는데…' 하는 의문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시앙스포도서관으로 가서 마침 평양에서 영어로 출간된 한국사 관련 책이었다. 그 책에서 기술하는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 완전히 반대였고, 1990년대에 기아로 허덕이던 이미지로 유명하던 북한의 경제력이 60년대에는 남한을 능가했다는 뜻밖의 사실도 발견했다. 서방 언론의 북한체제에 대한 거친 선동과 북한이 직접 기술한 그들의 역사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을 터였다. 이 놀랍도록 상반된 주장들은 그의 지적 호기심을 즉각적으로 자극했고, 이는 그의 석사논문 <북한의 경제 개방>으로 결실을 맺었다. 

파리정치대학 졸업 후, 그는 국립행정학교(ENA)에 진학했다. 더 보탤 수도 없는 소위 엘리트 코스. 그것이 그가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국립행정학교에 진학했다는 말은, 한국에서 행정고시를 패스했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이미 고위공무원 취급을 받던 국립행정학교 시절, 사람들 틈에 껴서 봉사하고 잔살림을 챙기는 데 남다른 재능을 지녔던 그는 학생회 임원으로서 그 능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에서의 지나친 역동성이 학교 측의 비위를 건드렸고, 학교는 최종평가에서 그에게 불이익을 주었다. 그는 학교가 추천하는 정부부처의 관료가 되기를 거부하고, 따로 공채시험을 쳐서 상원의회(Sénat)의 사무처에서 일하게 되었다. 

상원의회의 사무처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시피, 열정을 바칠 만한 재미가 퐁퐁 솟는 곳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재빨리 찾아 나섰다. 협회 활동이었다. 각자의 입맛에 맞는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아주 흔한 삶의 한 방식이다. 이들은 흔히 돈을 버는 직업과 열정을 바치는 협회 활동에 동등한 에너지를 쏟으며 산다. 사람 셋만 모이면 협회 하나가 만들어질 만큼. 수백만 개의 협회가 존재하고, 그것은 삶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확대·분산하고 참여를 통해 행복을 증폭시키는 프랑스식 생활방식이다. 

1789혁명의 강경파 '로베스피에르의 친구들', 1871년 40일간 민중들이 파리를 접수했던 '파리꼬뮌의 친구들' 사건, 인권법률가들이 만든 '이주노동자지원협회'와 '지적장애우지원협회' 등. 그는 협회 활동을 통해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관점을 신념으로 변화시키는 방법들을 찾아가며, 종종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시간들을 가졌다. 2004년 프랑스-한국친선협회에 가입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였다. 상원의회에서 만난 한 동료의 소개로 이 협회를 알게 되어 가입했으며, 2005년 다른 협회 회원들과 첫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정치체제가 다를 뿐, 남북한 사람들은 똑같다

목수정(아래 목) : 북한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 

브누아 켄더(아래 켄더) : 당시 프랑스 사람 대부분이 갖고 있던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기아였다. 그러나 적어도 평양에서는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물론 평양에서 본 것이 북한의 전부는 분명 아니겠지만, 적어도 당시 북한이 기아상태에서 벗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Kiev)를 연상시켰다. 잘 통제된 구소련 시절의 동구권 도시 같은 인상이었다. 자유의 부재는 두드러졌다. 관광객이건 북한 주민이건 마찬가지였다.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당에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방문이 가능한 곳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이것이 첫 방북에서 내가 가장 실망했던 부분이다. 또 한편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이드나 평양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놀라운 호의였다. 

목 : 평양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많지도 않을 테고, 손님으로 온 사람들한테 잘해주는 것은 상식 아닌가.

켄더 : 그런가? 그들은 미국을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미국인과 같은 백인이고 서방 사람들이니까 적어도 일종의 경계심 같은 것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폐쇄된 사회에 사니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테고. 그러나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진정한 호기심, 따뜻함이 그들에게 있었다. 언어에 대한 문제만 사라지면 그들은 이런저런 궁금증을 쏟아내곤 했다. 2006년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대학에서 마주친 학생들이 내가 프랑스인이란 사실을 알고 던진 첫 질문은 "지네딘 지단이 왜 박치기를 했냐?"였다.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런 사소한 사건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목 : 당신은 여러 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는데, 특히 '프랑스-한국친선협회'에 가장 많은 관심과 열정을 쏟는 것 같다. 

켄더 : 다른 협회에도 회비를 내고 회원들을 만나지만, 프랑스-한국친선협회에서 가장 역동적인 현실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 관심 있는 프랑스인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적은 노력으로도 비교적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는 협회이기도 하다. 남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케이팝 등에 대한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관심이다. 

북한은 훨씬 더 주목을 끄는 나라지만, 희귀한 동물을 보는 듯한 호기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와는 정치·경제체계가 상반된 북한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 선동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북한을 끔찍한 스탈린주의 시대의 연속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프랑스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감히 이 감춰진 세계에 대한 진실을 알려 하고,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상황을 개선해 보려 한다. 한국 사람들(남북한 모두)에게서 항상 강한 인상을 받는다. 그들에게 자극받는 것도 내가 이 협회에 열정을 갖는 이유다. 

목 : 한국 사람들의 어떤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나? 

켄더 : 치열함. 한 번 결심하면 전력을 다해 끝까지 가는 모습, 무서운 결단력. 프랑스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에 비해 훨씬 정직하다. 

목 : 한국 사람들이 꼭 정직하지만은 않다. 

켄더 : 난 독신이고,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생활하는 공무원이니까 사실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종종 어려운 처지에 있는 유학생들의 집 보증을 서준 적이 있다. 갈수록 프랑스 부동산업자들이 세입자한테 보증인을 요구하지만, 유학생들이 보증인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얘기니까. 지금까지 열 명이 조금 넘게 보증을 서줬지만 단 한 번도 문제가 발생한 적 없었다. 프랑스 학생이었다면 이러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목 : 내가 보기에는 아슬아슬한 모험을 했던 셈이다.  

켄더 : 그 정도가 모험이랄 수 있을까.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죽어갔던 남한 학생들에 대한 책(Les mouvements étudiants en Corée du Sud, <한국의 학생운동>, 현정임 지음)을 읽은 적이 있다. 젊은 학생들이 온몸을 바쳐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치열하게 싸운 걸 보면서, 내가 그런 나라 학생들에게 베푸는 이 작은 친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목 : 협회 이름은 프랑스-한국친선협회지만 북한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켄더 : 그렇다. 1969년에 처음 조직됐을 때 이름은 프랑스-북한친선협회였다. 북한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공산당 계열의 프랑스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협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프랑스-한국친선협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내용적으로도 한반도 전체로 관심을 넓히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이 우리 협회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주요 관심사다. 

목 : 한반도의 통일이 당신들에게 왜 중요한가?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관심이기도 한가? 

켄더 :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냉전시대의 잔해를 안고 사는 나라다. 이는 지구 전체로 볼 때도 평화를 위협하는 불씨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미 사라져 버린 냉전시대의 산물을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한반도에 통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에는 북한 사람이 50명 정도, 남한 사람은 1만 명 정도 있다.  

내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걸 주변 사람들이 아니까, 끊이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친구가 친구를 데려오고 소개시키고 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북한 사람들은 내게 남한 사람이 어떤지 물어보고, 남한 사람들은 내게 북한 사람들이 어떤지 물어본다. 서로 정치체제가 다르다는 그 껍데기만 벗겨버리면, 남북한 사람들은 똑같다. 그들은 똑같이 밤새워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수줍음이 많은 것, 매우 센티멘털하기도 하고, 부탁하는 것을 지독히 어려워하며, 가족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이 끔찍한 것, 연장자에 대한 존대 등 지극히 유교적인 태도, 심지어 외국인에게 궁극적으로는 폐쇄적인 점까지 같다. 

목 : 외국인에게 폐쇄적이다? 

켄더 : 꼭 잘나가다가 "넌 프랑스인이니까 절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어"라는 식의 말을 한다.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사고다. 이런 것도 남북한 사람 모두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은 같은 사고를 하고, 똑같이 한국음식에 대한 애착이 강하며, 언어와 전통도 같다. 그런데 서로 만나면 법에 저촉된다. 남한에는 국가보안법이 있고, 북한에는 그런 법은 따로 없지만 분명 문제가 발생한다. 더구나 북한 사람은 극소수만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행동을 감시한다. 그런 양쪽 한국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안타깝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그들은 다시 만나서 한 울타리에서 살아야 한다. 

목 : 당신은 전태일 열사,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추모행사를 왜 하지 않는가 하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했나. 

켄더 :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남한에 있는 운동세력들도 NL과 PD로 나뉘어 있고,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세상 어디에나 정당과 정파가 있고, 서로 다른 노선과 방식으로 세상을 개혁하려 애쓴다. 그러나 적어도 공동의 이슈가 있을 때는 결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더구나 프랑스에는 한국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나는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민주화운동이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정표라고 본다. 바로 이런 날에 재불한인들이 모여서 뜻을 함께 나누는 게 좋지 않나. 비판할 점은 비판하더라도, 뭉칠 때는 뭉치면 좋지 않을까 해서 생각해본 것이다. 

목 : 그러니까 당신의 입장에서 (적어도 프랑스에 있는) 남한의 진보세력들을 만나게 하고 싶다?  

켄더 : 그런 셈인데 호응이 없다. (웃음)

"국정원이 나를 투사로 만든다"  

목 : 프랑스-한국친선협회가 북한으로부터 돈을 지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켄더 : 국정원이 퍼뜨리고 다니는 전형적인 악선전의 하나다. 만약 그런 얘기를 하는 언론이나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허위사실 유포와 중상모략으로 고발할 것이다. 우리 협회의 회원은 170명 남짓이고, 그중 120명이 꼬박꼬박 연회비를 납부한다. 우리는 회원들의 연회비로만 운영되는 협회다. 

목 : 국정원한테 많이 당한 모양이다. 

켄더 : 물론이다. 한 번은 나를 불러서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한국 외교부가 프랑스 외교부를 통해 내가 일하던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쫓아내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우리 협회에 대해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을 시도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얌전하던 브누아 켄더도 이 대목에서는 이를 간다).

목 : 그런 위협까지 당하면서 협회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

켄더 : 이명박 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별 일 없었다. 조용했다. 이명박이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국정원 활동이 활발해졌고, 우리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2008년 한국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집회가 불붙었을 때, 우리도 사이트를 통해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다. 국정원의 공격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나에게 접근해왔던 한국인 중에 적어도 서너 명은 국정원의 정보원이었다. 내가 이 활동을 그만둘 의향이 있느냐? 아니. 사실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있고 난 뒤 이 일에 더 재미가 붙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더 심해졌다. 일단 파리에 주재하는 국정원 직원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 

그들이 우리를 방해하면 할수록, 우리가 하는 일이 뭔가 의미가 있었던 거구나 싶고,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해줘야지, 하는 투지를 불태우게 만든다. 나는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이다. 협회 활동이 내 일에 어떤 지장도 초래하지 않는다. 상원에는 티베트에 열정적인 의원을 비롯해 베트남, 캄보디아, 대만 등 여러 나라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한국에 갖는 열정을 모두가 잘 알고 도와주려고 하지, 방해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국정원이 나를 투사로 만든다. (웃음) 넬슨 만델라가 그렇게 오랜 세월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그가 위대한 만델라가 될 수 없었을 것처럼.

목 :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햇볕정책이 생각난다. 바람이 부니 더 옷을 꼭꼭 껴입는 남자. 해가 나면 옷을 벗는 남자. 

켄더 : 나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김대중 정부가 구상했던 바로 그런 방향으로 통일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목 : 당신이 협회 활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걱정하시지 않나? 

켄더 : 무슨 소리. 어머니도 프랑스-한국친선협회의 회원이다. 내가 협회 사이트에 글을 올리면 어머니가 제일 먼저 읽고 틀린 곳을 바로잡아 주신다. 아버지도 흥미로워하시지만, 어머니가 특히 열정적이시다. 

목 : 프랑스-한국친선협회는 왜 북한만 단체 방문하나. 단체로 남한을 다녀온 적은 없지 않나? 

켄더 : 남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프랑스에서는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인기가 있다. 아주 간단하게 기자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내가 어떤 기자에게 북한에 대한 사실 하나를 말해 주면 바로 기사가 난다. 그러나 남한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신문에 안 난다. 실제로 보지 않았나? 박근혜가 파리를 다녀갔는데도 신문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남한에 아주 많은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나마 여러 차례 언급된 사건은 세월호 침몰사고 정도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 어떤 언론도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내부 정치문제는 잘 다루지 않는다.

다루기 껄끄럽기도 하도, 대중의 관심을 끌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죽지 않는 한.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북한은 다르다. 북한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비상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라다. 대체 저 감춰진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래서 아주 작은 일만으로도 기사가 난다. 

북한에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대부분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이미 세계 곳곳을 두루 여행한 사람들이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차원에서 북한에 가보고 싶어 하고, 도보여행자들은 남들이 안 가는 곳을 걷고 싶어 한다. 이들 사이에는 묘향산과 금강산이 제일 인기가 있다. 그밖에도 북한식 태권도를 배운 사람, 사진작가, 정치학자들, 사업가들도 있다. 스포츠 교류, 남한의 영화나 문학에 관심 가진 사람들이 북한의 것도 알아보기 위해 방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한은 두 번, 북한은 다섯 번 다녀왔다. 서울에 두 번째 갔을 때는 국제의회연맹(IPU) 총회 때였다.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교차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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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의회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브누아 켄더. ⓒ 목수정

목 : 프랑스 공산당과 북한과의 관계는 어떤가?

켄더 : 프랑스 공산당은 10년 전부터 북한과의 모든 협력을 끊었다. 북한 노동당은 오히려 프랑스의 우파정당인 대중민주연합(UMP), 사회당(PS)과는 협력관계가 있어도, 공산당하고는 없다. 1994년 프랑스 공산당은 자신들의 모델이 러시아의 10월혁명이 아니라 프랑스대혁명이라고 선언하면서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었다. 단, 베트남 공산당과는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 

목 : 당신은 한반도의 통일을 열망한다고 했다. 무엇이 통일을 가장 크게 방해한다고 생각하나? 

켄더 : 통일의 가장 큰 장애는 남북 간의 엄청난 경제적 격차라고 본다. 독일에서처럼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통일이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에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이 될 것이다. 지금의 격차를 본다면, 북한 주민들이 통일 이후에 2등국민이 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최대한 충격을 상쇄해가는 방식을 찾아 점진적으로 통일에 접근해가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완벽한 프로그램이었다. 서로가 강력하게 통일을 원할 때, 서서히 문을 열고 교류를 확대해가다가 통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난 통일이 되리라고 본다. 

목 : 남북한을 두루 둘러본 사람으로서 두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당신의 생각을 말해달라. 

켄더 : 남한은 물론 멋진 나라다. 불과 30~40년 만에 카메룬 수준에서 포르투갈 수준으로 단숨에 올라섰다. 산을 들어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한국 사람들의 에너지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한다. 게다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앞선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형편없이 추락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으면 삶의 전반적인 수준이 동반 퇴보한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 그게 가장 시급한 한국의 과제다. 

또 한 가지. 한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한국을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데, 그것은 한국이 아직까지 남들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문화를 국제사회에 설득 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케이팝이 조금 알려지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케이팝은 한국음악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한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한국의 독립음악이나 전통음악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한국문화를 알리려는 노력에 있어서 너무 안이한 모습을 보인다. 케이팝의 반짝 성공을 한국문화의 전파로 믿고 싶어 하는 태도. 거기서 바로 걸림돌이 발생한다. 

목 : 북한은? 인권문제와 3대 세습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 

켄더 : 나는 우리(서구)의 잣대로 그들의 인권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물론 나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장성택이 사형에 처해졌을 때도 협회에서 "우리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에는 진화의 단계가 있는 법이다.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목격하는 것은 그들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고 자주 교류하는 것이 그들의 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본다. 사람들이 북한을 비판하는 가장 핵심 지점은 세습체제다. 김씨 일가로 이어지는 절대 권력의 세습에 대한 일반적인 프랑스 좌파의 시선은 명확하다. 바로 그 세습 때문에 프랑스 좌파들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고 여러 번 북한을 다녀온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와 매우 다른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질서에서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 나름으로는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라는 과제를 실현하고, 자본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국가계획경제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다. 각각의 사회는 그들이 처한 현실과 역사적 배경에 맞추어 각자의 진보를 이루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 : 언제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보면 그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는 것 같은 모습을 당신에게서 본다. 마치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교차로에 서 있는 심부름센터처럼. 

켄더 :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그를 꼭 끌어안으라." 로베스피에르가 한 말이다. 난 그의 이 말을 좋아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목 : 당신에게 좌파란 무엇인가? 

켄더 : 좌파란, 보다 평등하고 보다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로의 변혁을 향한 의지로 결정된다. 

브누아 켄더의 좌파에 대한 정의는 국립행정학교 학생의 모범답안처럼 단숨에 또르르 흘러나왔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6월 23일 파리의 한 카페에서, 그리고 24일 상원의회 건물 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이틀에 걸쳐 이뤄졌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 -경비, 사무국 동료, 상원의원들- 모두와 반갑게 인사하고, 잠시 멈춰 서서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10여 명이 넘는 그들과 인사를 하고 어색한 수다를 나눈 후에야 그의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원의회 건물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국통인 브누아가 한국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에 익숙해 보였다. 그는 어찌 보면 차가운 머리와 미지근한 가슴 사이를 오가는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따분한 공무원생활 중 한국이란 뜨거운 도랑에 휘말려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함께 그곳을 헤쳐 나오는 악동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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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상원의회 외관. ⓒ 목수정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진 않지만, 이 오지랖 넓고 부지런한 남자는 삭막해져가는 세상에서 제법 쓸모 있는 좌파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로베스피에르가 말했던 것처럼 해보고 싶어졌다. 

어디를 가든 거기에는 분명히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주저 말고, 그의 손을 덥석 잡고, 그가 세상을 향해 화답할 수 있도록, 그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껴안아주는 것. 갑자기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이름이 로베스피에르인 사실마저 뿌듯해진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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