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qoAylo

<9> 온달 (상)
`바보' 소리 들으며 눈먼 노모 봉양한 효자
2010. 04. 29   00:00 입력 | 2013. 01. 05   05:33 수정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아단성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온달산성이다.


온달산성 아래 관광단지에 세워진 온달 장군 조형물.

온달(溫達)은 신라에 빼앗긴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남정 길에 올라 아단성(阿旦城)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한을 남긴 채 전사한 고구려의 용장이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긴 영웅·호걸·기인·재사는 많지만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역사의 무대를 유유히 가로질러 간 인물은 온달밖에 없다.

남루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며 구걸해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했다는 효자 온달, 바보라고 놀림을 받던 온달을 지아비로 섬겨 무술과 담력이 뛰어난 맹장으로 거듭나게 한 평강공주(平崗公主),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피로 얼룩진 삼국 쟁패사의 한 장을 풍류의 멋으로 장식하고 지나간 한 줄기 향기로운 바람과도 같았다.

고구려 제25대 임금 평강왕은 평원왕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성명은 고양성(高陽成). 양원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양원왕 13년(557년)에 태자로 책봉됐고, 2년 뒤인 559년 3월에 부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평강왕이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전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강왕의 가족으로는 두 명의 왕후와 세 명의 왕자, 한 명의 공주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재위 7년(565년) 정월에 왕자 원(元)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고 했고, 제27대 영류왕 조를 보면 ‘왕의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고도 하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이다’라고 했으니 최소한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제28대 보장왕 조에는 ‘왕의 이름은 장(藏) 또는 보장(寶藏)이라고도 하며,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건무왕(영류왕)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라고 돼 있다. 따라서 평강왕에게는 뒷날 그의 뒤를 이어 영양왕으로 즉위하는 맏아들 고원,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되는 고건무, 그리고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쿠데타에 의해 왕좌에 올랐다가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 된 고보장의 아버지 대양왕 등 세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평강대왕에게는 이 세 아들 말고도 외동딸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 고대사를 빛낸 여걸의 한 사람인 평강공주다. ‘고구려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은 ‘열전’ 온달 편에 실려 전해오기 때문이다. 

평강공주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성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씨(高氏)라는 사실이 분명하지만, 평강공주란 다만 ‘평강왕의 딸’이란 뜻이지 이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온달은 뭇사람에게 바보라고 놀림받던 미천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울보 공주로 유명했던 평강공주와 거리를 헤매며 구걸하던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가 무슨 까닭에 잘 울었으며, 온달은 어찌하여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공주의 신랑이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 사연을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시 동북아 최강국으로서 중국의 숱한 하루살이 제국을 우습게 여기던 대고구려의 공주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저자를 헤매면서 동냥하던 온달에게, 그것도 제 발로 찾아가 아내가 됐을까. 과연 이러한 비상한 사건(?)이 엄격한 신분제도의 절대왕권 시대에 실제로 일어나기는 했던 것일까. ‘열전’ 온달 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 온달은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그의 얼굴은 멍청하게 생겨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속마음은 순박했다. 집이 몹시 가난해서 항상 밥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오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면서 말했다. “네가 늘 울기만 하여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크더라도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으므로 꼭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 -

공주는 어려서부터 잘 우는 버릇이 있었다. 아무리 달래고 꾀어도 한번 터진 공주의 울음보는 막힐 줄을 몰랐다. 그러자 어느 날 부왕은 이런 말로 공주의 울음을 달랬다.

“오냐 오냐. 너 자꾸만 그렇게 울어보라우야. 그렇게 울면 널 어떤 사내가 각시로 데려가갔네? 그렇게 자꾸만 울기만 한다면 다음에 커서 좋은 신랑에게 시집가기는 다 틀린 줄 알라우야. 자꾸 그렇게 울기만 한다면 저기 저자를 헤매고 다니며 비럭질하는 바보 온달이란 녀석에게 시집보내고 말기야!”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주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왕을 쳐다보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바지. 바보 온달이가 누구야요?”

아마도 온달이란 이름을 처음 듣기에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온달의 이름을 듣자마자 신통하게도 공주가 울음이 뚝 그쳤던 것이다.

그때 평양성 하부(下部)에는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매우 가난한 모자가 살고 있었으니 늙고 눈먼 홀어미는 성도 이름도 없었고,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생긴 그의 아들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해서 사람들이 온달이라고 불렀다. 우리 옛말에 100을 ‘온’이라 하고 산을 ‘달’이라 했으니 온달이란 수많은 산처럼 장대한 몸집의 사내란 뜻이었을 것이다. 

추측건대 이를 한문자로 옮겨 쓰면서 온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본편의 주인공인 온달 장군을 봉성 온씨(鳳城溫氏)들이 문중의 도시조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참고로 덧붙인다.

온달 모자가 사는 형편은 매우 가난했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몹시 가난해 날마다 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저자를 헤매며 밥을 얻어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속마음은 순박했지만 얼굴이 멍청하게 생겨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온달이 당당한 체격을 지닌 젊은이였다면 하다못해 산에서 땔감나무를 해다가 팔거나, 건축공사장에서 인부로 일을 하거나, 아니면 군대에 들어가 군인 노릇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지가 멀쩡하고 힘 좋은 젊은이가 굳이 바보 소리까지 들으며 구걸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온달이 걸식을 해다가 눈먼 노모를 봉양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온달의 이름은 평양 성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고, 마침내 대궐까지 들어가 대왕에게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됐으며, 그래서 공주가 울 때마다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로 울음을 그치게 했던 것이다.

거짓말도 자꾸 하면 참말처럼 들리기 마련인가. 날이면 날마다 울면 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소리는 마침내 평강공주의 귀에 못이 박일 정도가 됐고, 그렇게 해서 온달이라는 이름이 공주의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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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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