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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극우 세력이 ‘문창극을 원했던 이유’
문창극 사퇴에 이어 정홍원 총리가 60일 만에 돌아왔다. 그동안 문창극 후보자가 청문회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보수 인사들이 화살을 청와대로 돌리고 있다. 이들은 청문회가 ‘역사 전쟁’의 무대가 되기를 바랐나.
이오성 기자  |  dodash@sisain.co.kr  [355호] 승인 2014.07.03  08:35:42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시국이 흘러간다. 차라리 드라마라면 텔레비전을 꺼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4월16일 이후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지금이 종반부인지, 아니면 아직 도입부에 불과한지조차 모호하다. 확실한 것은 사라진 줄 알았던 악역 배우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얼굴에 점 하나 찍지 않은 채로.

‘황당’ ‘당혹’이라는 평이 가장 맞춤하다. 사의를 표한 국무총리가 헌정 사상 최초로 살아남았다. 정치권의 모든 하마평과 ‘설’이 무색해졌다. 세월호 참사 직후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절규하는 가족들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자동차에 숨어 있던 무능한 총리가 다시 돌아온 까닭도 명확해졌다. 설마 했지만, 더 이상 청와대가 내놓을 인물이 없다는 뜻이다.

청와대는 6월26일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 방침을 발표하면서 “청문회 과정에서 노출된 문제로 국정 공백과 국론 분열이 큰 상황이다.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서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를 반려했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이다. 청와대가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국론 분열을 일으킨 문창극의 친일 논란’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시각도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했다. “밖에서 보기에는 문창극씨가 버틴 것처럼 보이지만, 버틸 때까지 버틴 건 사실 청와대다.” 버틴 게 청와대라니,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상황을 버텨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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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
6월20일 문창극 총리 후보자 지지자들이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후보자의 퇴근을 기다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보수 논객들도 ‘문창극 청문회’ 개최를 강력히 주장했다.
6월20일 문창극 총리 후보자 지지자들이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후보자의 퇴근을 기다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보수 논객들도 ‘문창극 청문회’ 개최를 강력히 주장했다. ⓒ연합뉴스

6월20일 문창극 총리 후보자 지지자들이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후보자의 퇴근을 기다리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보수 논객들도 ‘문창극 청문회’ 개최를 강력히 주장했다.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이 총리 후보자 자격으로 활동한 14일 동안 역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갔다. 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 되었고, 제주 4·3은 폭동이 되었다. 22년째 매주 수요일에 시위를 벌이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의 문제는 이미 종결된 사건처럼 되었다. 안대희 전 총리 후보자의 자진 사퇴 파동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그 결과 정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앞질렀고, 두어 달 전만 해도 60%를 웃돌던 대통령 지지율이 40%대 초반으로 주저앉았다. 청와대로서는 문창극 카드를 하루 속히 접었어야 했다. 그러나 결국 2주일을 끌었다. 이런 ‘방치’가 꼭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상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었다. 국민 10명 중 7명이 문창극 후보자가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와중에 문 후보자를 옹호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6월13일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신호탄을 쏘았다. 그는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문창극 후보자가 햇볕정책과 종북을 비판해서 괘씸죄에 걸렸다”라고 주장했다. 이때는 문창극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 동영상이 공개된 직후였다. 국민 여론이 문창극 후보자에 대해 가장 싸늘할 때 ‘용감하게’ 칼을 빼든 셈이다.

이후 보수 인사들의 ‘지원사격’이 하나둘 이어졌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선동 언론과 부패한 국회의원들이 편향된 정보를 확산시켜 문창극 후보자를 두들겨패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장춘 전 외무부 대사도 “문창극 후보자가 기독교 장로로서 세속 한국의 정체를 깜빡 잊고 터뜨린 오발탄(‘하나님의 뜻’) 빼고는 넘치는 애국심에 따라 개진한 관찰·소신에 무슨 잘못이 있나?”라는 트윗을 올렸다.

‘문창극 구하기’에 나선 류근일·조갑제·MBC

하이라이트는 MBC의 ‘참전’이었다. MBC는 6월20일 밤 9시50분 <긴급대담, 문창극 총리 후보자 논란>을 방영했다. 자사의 간판 토론 프로그램인 <100분 토론>보다 30분이나 긴 이례적인 편성이었다. MBC는 이 프로그램에서 문창극 전 후보자의 온누리교회 강연 동영상을 통으로 공개했다. ‘토론을 빙자한 문창극 살리기’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결과적으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후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낼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주말 내내 아무런 조처를 내놓지 않았다. 반면 MBC 방영 이후 보수 언론은 문창극 지키기에 화력을 집중했다. 문창극 후보자에게 청문회에서 해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KBS 보도가 앞뒤 맥락을 자른 짜깁기라고 비판했다.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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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뉴시스</font></div>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편찬(오른쪽)되는 등 보수·극우 세력의 어두운 과거가 폭로되면서 보수 세력의 역사 전쟁도 본격화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편찬(오른쪽)되는 등 보수·극우 세력의 어두운 과거가 폭로되면서 보수 세력의 역사 전쟁도 본격화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뉴시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편찬(오른쪽)되는 등 보수·극우 세력의 어두운 과거가 폭로되면서 보수 세력의 역사 전쟁도 본격화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정치권 관계자가 박 대통령이 ‘버텼다’고 말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그의 말은 이랬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의식해서인지 친일 문제에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아베와는 공식적으로 악수하는 것도 꺼릴 정도다. 그런데 문창극 사태가 불거지면서 스타일이 구겨졌다. 카드를 버리려는데 후보자가 뜻밖의 태도를 보였고, 보수 진영에서 일제히 지원사격에 나섰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며칠을 버틴 셈이다. 만약 여론이 문창극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기라도 했다면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사 청문회가 열리는 꼴을 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문창극 후보자가 자진 사퇴한 뒤에도 논란이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커져간다. 유명 보수 논객부터 극우 성향 사이트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이용자들까지, 각계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철회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의 말마따나 “보수 성향 지지자들의 분노가 KBS와 새누리당을 넘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 전 대표는 정홍원 국무총리의 유임 직후 “악역을 피하려는 지도자는 그만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문창극 사태에서 보수(극우) 세력이 진정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한결같이 “문창극 후보자가 청문회까지 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6월22일 보수 인사 482명은 “문창극씨가 청문회도 없이 사퇴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라며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청문회에서 문창극씨가 대체 뭘 보여줄 수 있기에?

문창극 후보자가 사퇴한 이튿날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는 ‘문창극 드라마’라는 칼럼에서 “장관 자질의 핵심은 역사관이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문창극 청문회는 달랐을 것이다. 역사 논쟁의 치열한 무대가 되었을 것이다. 친일파, 조선시대 평가, 친미와 반미, 한국전쟁과 북한 다루기, 중국과 한반도, 경제민주화와 개인 자립심이 주제였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 수준을 높일 기회였다.”

‘역사 논쟁의 치열한 무대.’ 보수 세력은 문창극 청문회를 본격적인 역사 논쟁의 장으로 삼고 싶어했다. 문창극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자신의 역사관에 대해 해명하고 반성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 아니었다. 한 보수 논객의 말처럼 ‘친일파 인민재판에 굴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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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 연합뉴스</font></div>
6월24일 문창극 후보 사퇴(위 왼쪽), 6월26일 정홍원 총리의 이례적인 유임 발표 이후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철회’ 선언이 이어졌다. 오른쪽은 2013년 2월26일 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정홍원 총리.
6월24일 문창극 후보 사퇴(위 왼쪽), 6월26일 정홍원 총리의 이례적인 유임 발표 이후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철회’ 선언이 이어졌다. 오른쪽은 2013년 2월26일 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정홍원 총리. ⓒ시사IN 이명익, 연합뉴스

6월24일 문창극 후보 사퇴(위 왼쪽), 6월26일 정홍원 총리의 이례적인 유임 발표 이후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철회’ 선언이 이어졌다. 오른쪽은 2013년 2월26일 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정홍원 총리. 보수·극우 세력이 ‘역사 전쟁’을 시도한 건 10여 년 전부터다. 2000년대 들어 민족지를 자처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 행각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들의 ‘위기감’이 커졌다. 이즈음 보수 세력이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결집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특히 2000년대 후반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이 본격화하고,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통해 독재 정권의 어두운 과거가 폭로되면서 보수 세력의 역사 전쟁도 본격화한다. 뉴라이트 역사 단체인 ‘교과서 포럼’을 통해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대안 교과서> 논쟁으로 토대를 일궜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교학사 역사 교과서 채택 논란은 그 연장선에 있었다.

보수 세력의 격한 저항은 ‘박근혜 길들이기’?

이들에게 문창극 후보자는 ‘열매’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하나님의 시련이라 표현하고, 4·3을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한국 사회의 국무총리가 되는 것을 ‘역사 전쟁의 승리’로 여기고 싶었을 것이다. 총리가 못 되더라도 청문회 자리에서라도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끝내 수포로 돌아갔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지금 상황은 극우 세력이 문창극 후보자를 통해 공세적 반격을 시도했고, 패배하자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수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극렬하게 저항하는 것을 일종의 ‘길들이기’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6월24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문창극 전 후보자는 “국민의 뜻만 강조하면 여론 정치가 된다. 이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가. 여론은 변하기 쉽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지배받기 쉽다”라고 말했다.

문창극을 사퇴시킨 건 대통령도, 정치권도 아니었다. 친일·반민족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사회의 눈높이였다. 공동체를 설득하고 이끌어가야 할 총리 후보자가 공동체의 여론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이번 사태는 잘 보여준다. 안쓰러운 것은 문창극 전 후보자와 보수 세력은 왜 자신들이 여론으로부터 외면당했는지 여전히 모르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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