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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왕조(夫餘王朝) 800년사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 desk@lec.co.kr 승인 2014.06.25 10:08:26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몇 년 전 모 방송국의 드라마 ‘주몽’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였다. 드라마 ‘주몽’은 우리 민족의 자랑찬 역사 고구려의 건국 시조인 ‘고주몽(혹은 추모)’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초창기부터 픽션의 요소를 잘 살려 가며 멋지게 그렸었다.
물론 허구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있지만, 웅대한 고구려 건국 이야기의 큰 흐름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의 시공간적 배경은 ‘부여’이다. 그 동안 부여는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갖는 장대함과 웅장함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부여가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갖는 의미와 역사성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예맥의 중심, 부여
예맥족의 한 일파임이 분명한 부여(夫餘, 扶餘)는 기원전 2~3세기 쑹화강(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이후 부여는 약 7백여 년간 고조선,고구려 등의 같은 예맥계 국가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漢) 이외에도 읍루(挹婁), 물길(勿吉), 선비(鮮卑) 등의 이민족 세력들과 화친과 전쟁 등의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민족사의 한 줄기로서 뚜렷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부여가 두 차례(기원후 285년,346년)에 걸친 선비족 모용씨의 강력한 공세를 격퇴하였다는 것만 보더라도 부여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또한 494년 고구려 문자왕에 의한 부여와 고구려의 통합은 만주 지역에서의 고구려-부여의 ‘남북국 시대’를 마치고 우리 역사의 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여는 시공간적으로 고조선과 병존하였고, 통시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서 인식, 자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고구려, 백제, 부여가 공존하고 있던 시기에도 고구려, 백제가 각각 부여와의 연고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었던 점은 당시 우리 민족사에서 부여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부여가 위만조선이 내분과 한(漢)의 군대에 의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이후부터 고구려가 출현하는 기원전 37년까지 예맥 문화권을 지탱하는 핵심적 세력으로 굳건히 버텨온 점은 결코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의 비논리적 역사인식의 근거로 활용는 현실이 안타까워
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의 중간 결산으로 간행된 『동북통사(東北通史)』에서 “(부여는) 건국 이래 기원후 494년 물길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대략 6백 년간 줄곧 중원왕조(中原王朝)에 예속되어 있던, 중원 왕조 통할 하의 지방민족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현재 우리 학계나 교과서에서 고대사(古代史)를 정의하고 있는 ‘삼국시대’라는 개념은 남쪽의 가야(伽倻) 뿐만 아니라, 북쪽의 부여를 민족사 인식의 범주 밖으로 스스로 밀어내고 있는 꼴이므로 재론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및 중국 측 여러 사료와 광개토대왕릉비문, 모두루묘지 등에는 부여-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라고 지칭되는 다양한 부여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부여사를 인식하는 데에 많은 혼선을 주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의 핵심은 동부여와 북부여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에 있다. 이에 대하여 중국 학계 뿐만 아니라 한국학계 내부에서도 많은 논쟁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학계의 다수는 기존의 제 사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전제로 ‘북부여=부여’이며, ‘동부여’란 훗날 이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세력이 세운 나라로 보고 있다. 이 견해는 본래 주몽의 고향은 쑹화강 유역의 북부여(부여)로서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 문자왕에 의해 합병되었고, 동부여란 3세기 말 선비족 모용씨의 공격을 받은 북부여의 일족이 세운 나라였으나 4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의해 통합, 멸망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부여’는, 탁리국 출신의 동명집단이 중심이 되어 길림지방을 중심으로 기원전 3~2세기 말경 ‘국가’를 형성, 기원후 4세기 중반 경 그 중심지를 ‘농안’ 지방으로 이동하여 494년까지 존속한 ‘부여’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동부여는 고구려 건국 당초부터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 후 285년 선비족의 모용씨의 제1차 부여 강습으로 부여(북부여)의 일부 핵심 지배 집단이 옥저 지방으로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41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사행동에 의해 멸망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라져 간 부여인
부여는 멸망하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이주하거나 그대로 토착하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세력들에 의해 흡수되어 갔다. 즉, 비록 주민의 대부분이 고구려에 흡수되기는 하였지만, 일부 주민은 쇠퇴 과정중에서 주변에 있던 선비족과 물길족 등의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두막루국(豆莫婁國)이다.
‘두막루’는 고구려와 부여의 말로 ‘고토(故土) 회복’을 뜻하는 다물(多勿)과 같은 뜻이다. 이러한 두막루국은 광개토대왕에 의해 멸망한 동부여의 일부 주민이 지금의 흑룡강성 서남부지역, 즉 원래 부여(북부여)의 고지(故地)에 건국된 나라였다.
부여의 후예였던 두막루국인들은 처음에는 고구려와 같은 부여말을 쓰면서 고구려가 멸망한 기원후 8세기대까지 존속하였으며 발해와도 공존하였으나 이후 발해나 거란에 의해 흡수 멸망당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두막루국의 존속까지 합한다면 약 800~900년 동안 존속했던 부여는 그 오랜 역사와 우리 민족의 원류의 큰 줄기로서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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