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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왕조(夫餘王朝) 800년사 (2)
오태진의 한국사 이야기   
오태진  |  gosilec@lec.co.kr  승인 2014.07.02  10:09:22

오태진 아모르이그잼 경찰학원 한국사 강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세력이 각각 그 정통성의 계승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것처럼 우리 민족의 원류가 되는 중요한 국가이다. 하지만 우리 교과서에서는 약 800여년 간이나 지속된 부여에 대하여 고작 한 쪽 정도로 간략하게 서술해 놓고 있어 부여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면을 빌려서나마 부여의 실체를 여러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B.C 3세기, 또다른 동명왕의 이동

부여의 국가 형성 시점과 관련하여 우리 학계에서는 북한 고고학계의 견해를 참작하였으며 기원전 5세기경 송눈평원의 예족이 송요평원으로 점차적으로 이주하면서 기원전 3세기경 탁리국의 동명 집단의 남하 및 망명을 계기로 국가 형성 단계에 진입하였다고 보고 있다. 

또 이 견해는 예군남려(濊君南閭)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초 眞番과 臨屯 등을 복속시켜 대세력을 형성한 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주변 집단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과의 교통을 통제하였다. 

이에 압록강 중류일대의 집단들은 유력집단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는데, 기원전 128년 한에 투항한 예군남려(薉君南閭) 집단은 이를 보여준다. 남려(南閭)의 투항을 받은 한이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도로개설에 나섰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예군남려의 집단은 요동군에서 동해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분포하였다. 

28만 명이라는 집단의 규모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제1현도군의 인구가 약 4만5천 호, 22만 구였고, 3세기경에도 고구려 3만 호, 동옥저 5천 호, 동예 2만 호였던 것으로 미루어 예군남려의 집단은 이들 전체를 포괄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예군남려의 집단은 강력한 통치조직을 갖춘 국가체라기 보다는 각지의 세력집단이 외압에 대응하여 완만하게 결집한 연맹체로 파악된다. 다만 각 지역별 집단규모로 보아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고구려연구재단)

로 표현되는 ‘원(原) 부여’가 형성되어 있었던 점, 그리고 고조선의 국가 형성 시점을 학자에 따라 기원전 3~4세기로 파악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부여의 국가 성립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서 2세기 말 사이 어느 시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박경철(1992, 1994, 2004)

한편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부여의 선행 문화인 서단산문화의 무덤 형식과 껴묻거리의 변화상을 고찰하여 그 후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5~3세기경 청동기문화에서 초기철기문화로의 이행과 사회 분화의 진전상을 검증한 논문도 있다. 박상빈(1996)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망해둔/한서 상층 문화에 바탕한 고리국(탁리국) 주민들이 제2송화강 중류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즉 ‘예지(穢地)’로 남하하여 서단산문화를 누리던 부여 선주민과 융합하여 부족국가 부여를 건국하였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송호정(1997, 1999)

완벽하게 논증해내는 것이 무척 힘든 고대사, 그 중에서도 상고사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부여는 중국의 한(漢) 제국과 동방의 동이족이라 통칭되는 다양한 민족 간의 관계 속에서 건국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여, 下戶 = 民 ?, NO!

부여의 지배 질서를 알 수 있는 사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三國志』 권(卷)30, 위서(魏書) 30 열전(列傳) 30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에 기록된,

邑落有豪民, 民下戶, 皆爲奴僕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민은 하호로서 모두 노복으로 삼았다.)

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이 사료를 통해 ‘왕, 제가, 호민, 민(하호), 노복(노비)’라는 계급 구조를 바탕으로 부여의 지배질서를 파악하였다. 

그러나 ‘민=하호’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견해가 대두하였다.(박경철, 2004) 박경철은 위 사료를 “읍락에는 호민과 민이 있고, 하호는 모두가 노복처럼 되었다.”고 해석하여, 민/하호 분별론을 제시하였다. 

즉, 당시 부여국의 피지배계층을 구성하는 신분 집단을 읍락에 거주하는 ‘민, 하호, 노복’으로 파악한다. 이는 국가 지배구조 자체가 읍락을 그 기본 지배 단위로 하는 제군장사회(諸君長社會[chiefdom] : 국읍 + 여러 읍락 = 국[國])를 대소(大小)로 파악하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견해는 국가 권력의 표상인 국왕으로의 권력 집중이 여의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가 일정한 전쟁수행 능력과 소정의 외교,행정역량은 물론 일정한 사법제도까지 운용하고 있는 ‘국가(state)’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만큼, 국가 권력의 인적, 물적 또는 군사적,경제적 기반이 되는 국가공민, 즉 자유민으로서의 민의 실재는 자명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민/하호 분별론은 부여국가의 군사 행동이 제가집단의 지휘 아래 스스로 무장한 민 신분집단을 주전력으로 하여 수행되었고, 하호 신분 집단은 비전투원으로서 주로 병참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파악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약했던 이유, ‘하호(예속민) > 민(자유민)’

한편, 이를 통해 부여의 국가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공적(公的) 지배 영역에 포섭된, 즉 시민권을 획득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은, 민(民)보다 제가(諸加)나 호민(豪民)에 의해 사적(私的)으로 예속된 하호(下戶)의 존재가 더욱 광범위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배질서와 국가 성격은, 부여가 고구려를 상대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쟁탈전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는 부여의 국가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 집권적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이처럼 부여의 지방세력이 하호 및 노복 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독자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5부 대가(大加)들의 연합체인 부(部) 체제 하의 고구려가 중앙집권체제의 진전도에서 부여의 사출도체제보다 우월하여 결국 고구려에 편입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강한 국가는 국가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의든, 타의든) 노예근성을 갖는 자들보다는 스스로 불합리한 것을 개척해 나가고자 자유 의지를 갖는 공민(公民) 즉, 자유민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P.S 이 말이 의심되면 북한과 남한을 먼저 비교해볼 것! 그리고,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교해 보고.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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