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9>제21대 문자명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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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장수왕 사후,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이 아닌 손자였다.
[文咨明王<一云明治好王> 諱羅雲, 長壽王之孫. 父王子古鄒大加助多, 助多早死, 長壽王養於宮中, 以爲大孫. 長壽在位七十九年薨, 繼立.]
문자명왕(文咨明王)<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나운(羅雲)이고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자이자 고추대가(古鄒大加)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태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당시 평양에 있던 고려의 대궐 안학궁에서. 고려 장수왕의 태손(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고려 21대 국왕. 휘는 나운으로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명리호(明理好), 개운(介雲), 고운(高雲)이라는 제각기 다른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 같은 발음을 가리키는 다른 표기법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제법 이름을 많이 바꿨던 모양이다.
[元年, 春三月, 魏孝文帝遣使, 拜王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王 『遣世子入朝』 王辭以疾, 遣從叔升千, 隨使者詣闕.]
원년(492) 봄 3월에 위(魏)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으로 임명하고, 의관 · 복물(服物) · 거기(車旗)의 장식을 주었다. 또 왕에게 명하였다.
『세자를 보내 입조케 하라.』
왕은 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종숙(從叔) 승천(升千)을 보내 사신을 따라 입궐하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중국의 《북사》는 이때 북위에서 온 사신은 북위의 대홍로(大鴻臚)였다고 전한다. 일찌기 장수왕이 죽었을 때, 직접 흰옷에 흰 모자를 쓰고 나아가 곡하며 애도식을 치렀던 효문제는 나운왕에게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려왕이라는 칭호를 보낸다. 물론 자기네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책봉'의 형식 갖춰가면서. 그리고 의관이며 옷이며, 수레 장식 같은 것을 보내면서, 세자를 보내라고 했다. 고려에서는 세자를 보내지 않고 왕실 종친을 보내 북위 황궁에 입궐시켰지만.
왕이나 왕세자를 다른 나라에 입조시키는 일은 유가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항복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로 비쳐지기 때문이라나. 단군이 요임금에게 세자 부루를 보내어 입조시켰다는 얘기는 남아있지만, 그밖에는 다른 나라에 국왕이나 그 세자가 '입조' 명목으로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고대의 당연한 룰이었던 것 같다. 앞서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길길이 날뛰던 백제의 아화왕이 자신의 태자를 '인질'로 보낸 것에 대해서 《삼국사절요》나 《동국사략》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었다.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여름 6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원년(492)
아, 맞다. 그러고보니 고려 사신이 북위뿐 아니라 남조의 남제에도 사신을 보냈었는데,
이때 남제에 도착한 고려 사신이 남조 접반사를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가 《동사강목》에 인용되어 있다.
장수왕이 위를 섬기기를 매우 근신하게 하였는데, 왕이 위를 계승하자 역시 직공(職貢)을 닦아 해마다 게을리하지 않아서 이 해에는 세 번이나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남조와도 교빙하여 고려 사신이 제(齊)에 이르니,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이 그가 통 좁은 바지[窮袴]를 입고 절풍관(折風冠)을 쓴 것을 보고 놀려 말했다.
“의복이 맞지 않는 건 몸의 재앙. 머리 위에 쓴 것이 무슨 물건이오?”
고려 사신이 대답했다.
“이는 옛 고깔[辯]의 유풍이오. 그대는 왜 기롱하시오?”
왕융이 더 대답하지 못하였다.
《동사강목》 임신년(신라 소지왕 14년, 고구려 문자명왕 원년,
백제 동성왕 14년, 가락왕 겸지 원년: 서기 492년)
고려 사신이 쓰고 있었다는 그 '고깔'이란 곧 절풍(折風)을 의미한다.
평민들이 쓰는 것은 절풍, 귀척들이 쓰는 것은 소골(蘇骨)이라 했는데, 모양새가 비슷해서 자주 혼동이 되었던 모양이다.
꼭대기[帽頂]가 뾰족한 고깔 모양의 모자를 턱밑에서 끈으로 맨 형상, 즉 변형모(弁形帽)로 우리나라 관모의 기본 형태다.
그 재료는 신분에 따라 달랐는데, 절풍에는 피혁이나 포백이, 소골에는 비단이 사용되었다.
'소(蘇)'는 솟[高], '골(骨)'은 갈[冠]의 사음(寫音)으로, '솟은 갓'이라는 뜻이다.
귀척들의 소골은 자줏빛 비단으로 만들어서 금은으로 장식하고, 벼슬하는 사람은 관 양쪽에 새깃을 꽂았다고 전한다.
<왕회도에 나오는 고려 사신의 모습>
[二年, 冬十月, 地震.]
2년(493)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고려 수도의 지진ㅡ
겨울 10월의 그 지진은 앞으로 고려라는 이 나라가 맞이하게 될, 엄청난 혼돈에 대한 하늘의 예지인지도 몰랐다.
[출처]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9>제21대 문자명왕(1)|작성자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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