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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1>제21대 문자명왕(3)

      대성산성과 안학궁 -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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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때의 고려는, 광개토태왕이나 장수왕 때에 비하면 상당히 맥이 꺾인 느낌이랄까.

뭐라 확답할수는 없지만 확실히 뭔가 다르다.

반면 백제와 신라는 예전에 비하면 어쩐지 강해졌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마치 고려만을 남겨두고 먼저 도약하고 있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그 두 나라와는 달리 점점 아래로 내려가려고만 하는 고려.

이 시기의 정세는 어쩐지 그러한 느낌이 가득했다.

 

[五年, 齊帝進王爲車騎將軍, 遣使入齊朝貢.]

5년(496)에 제 황제가 왕을 승진시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정동대장군에서 다시 거기장군으로 승진이라. 조공 주고 받은 거라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것들이 우리를 나름 '우대'해준 상징이라고 보면 덜하려나?

 

[秋七月, 遣兵攻新羅牛山城. 新羅兵出擊泥河上, 我軍敗北.]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군이 이하(泥河) 가에 나와 반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이하 강가에서 고려 군대를 대패시킨 신라측 장수는, 이번에도 지난번 견아성에서 활약했던 신라 장수 실죽.

이제 고려의 골칫거리, 변경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가시는 북쪽의 중국이 아닌 남쪽의 백제와 신라가 되고 있었다.

아무리 힘이 약해졌대도 한때는 고려를 위협해 그 왕을 전사시킨 이력이 있는 백제이고,

더이상 고려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국체를 지키려 하는 신라.

이 두 남쪽의 나라들과, 북쪽의 여러 이민족 왕조 사이에서 숨가쁘게 호흡을 고르고 있는 고려.

우리 역사의 5세기가 아주 빠르게 수레바퀴 돌듯 돌아가고 있다ㅡ.

 

[六年, 秋八月, 遣兵攻新羅牛山城, 取之.]

6년(497)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허나 아직은 모르는 일. 고려는 아직 죽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의 반격에 밀려 쫓겨났던 고려는, 이듬해 다시 신라를 공격해,

기어이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함락시키고야 만다.

지금의 충청도 청양군에 있는 산성. 둘레 약 965m에 성벽 높이는 높은 곳이 7m쯤 되지만

험준한 언덕위에 빙 돌아쳐져 있어서 사진에서 보면 가까이 접근하기는 힘들어보인다.

이곳이 고려와 백제, 신라가 그렇게 각축을 벌이던 기록 속의 그 우산성이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어놨다.

 

<우산성. 고려 문자명왕이 보낸 고려군이 이곳을 친지 2년 만에 신라에게서 빼앗았다>

 

여기 성안에는 우물이 두 개 있었다던데, 지금은 없다던가.

 

[六年秋九月己酉朔壬子, 遣日鷹吉士使高麗召巧手者.]

6년(493) 가을 9월 기유 초하루 임자(4일)에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기술자[巧手者]를 부르게 했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 15, 닌켄키(仁賢紀) 6년 계유(493)

 

기술자를 부르기는. '주세요'하고 청한 거지.

 

[是歲, 日鷹吉士還自高麗. 獻工匠須流枳, 奴流枳等. 今倭國山邊郡額田邑熟皮高麗, 是其後也.]

이 해(493)에 히타카노 키시가 고려에서 돌아왔다. 공장이[工匠] 수류지(須流枳)와 노류지(奴流枳) 등을 바쳤다. 지금 야마토국 야마베군(山邊郡) 가쿠덴읍(額田邑)의 熟皮高麗는 그 후손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 권제 15, 닌켄키(仁賢紀) 6년 계유(493)

 

이때 고려에서 왜국으로 건너간 수류지와 노류지 두 사람은 무두장이였다.

소와 사슴의 가죽을 잘 다루었다는데, 그들에 의해서 왜국의 모직물산업에 나름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七年, 春正月, 立王子興安爲太子. 秋七月, 創金剛寺. 八月, 遣使入魏朝貢.]

7년(498) 봄 정월에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였다. 8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이 해에 평양에 금강사라는 새로운 절이 지어진다.

후고려 때까지도 이 절이 남아있어서, 천자가 서경에 행차할 때면 간간이 이곳에서

문두루도량을 열기도 했고, 이규보 같은 사람이 제문을 지어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작성할 즈음에는 이미 폐사되어

그 터만 평양부 동북쪽 8리 되는 곳에 남아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후고려가 망하면서 함께 사라져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청암리토성 안에 있는 그 터는 1938년에 발굴되었는데,

기단 한 변이 10.2~10.4m 되는 큰 목탑을 중심으로 남쪽에 문과 금당,

양쪽에 전당, 뒤쪽에는 강당과 몇 채의 집이,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좌우와 북쪽에 각각 1개씩의 금당을 배치한 '1탑 3금당 양식'이었고,

목탑터 둘레에 0.7m 폭으로 빙 둘러 돌을 깔고

다른 건물로 연결되는 통로에도 돌을 깔아 길을 닦았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25호다. 

 

앞서 광개토태왕 때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평양의 절들을 보면 우선 부벽루로 유명한 영명사와

대성산의 광법사를 비롯해, 주암(酒巖) 곁에 있었다는 주암사(酒巖寺)가 나오고, 

평양부 남쪽에 홍복사(弘福寺)와 인왕사(仁王寺)가 있었고, 창관산(蒼觀山)에 있었던 신호사(神護寺), 

소라산(所羅山)과 서산(西山)에 있었던 동ㆍ서 망일사(望日寺),

소산(所山)과 마둔산(麻屯山) 에 있었던 남ㆍ북 망일사(望日寺)와 성 안의 장경사(長慶寺),

광법사와 마찬가지로 대성산 안에 있었던 두타사(頭陁寺), 용악산의 회룡사(回龍寺)와 용악사(龍岳寺),

대보산에 있었던 송태사(松泰寺), 사기리산(沙器里山)의 용천사(用泉寺), 백록산(白鹿山)의 환희사(歡喜寺),

자화산(慈化山) 화원사(花元寺), 건지산(巾之山) 천림사(天林寺), 눌산(訥山) 원명사(元明寺) 등의 이름이

실려있다.(주암은 바위 틈에서 술이 흘러나왔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조선조에는 이미 폐허로 버려진 금강사와 흥국사(興國寺), 병현(竝峴)에 있었던 중흥사(重興寺),

평양 남쪽 1백 보 거리에 있었던 흥복사(興福寺)까지 더하면 되겠지만 지금까지 멀쩡하게 남아서

전해지는 절은 단 한 채도 없다.

 

뜬금없이 《니혼쇼키》를 들먹여서 미안하지만 고토쿠키(孝德紀) 하쿠치(白雉) 원년(650)조에 보면

"옛날 고려가 절을 짓고자 둘러보지 않은 땅이 없었는데 어떤 땅에 이르러서

흰 사슴이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땅에다 절을 지어 백록원사(白鹿薗寺)라 하고

불법(佛法)을 받들어 지켰습니다[昔高麗欲營伽藍, 無地不覽, 便於一所白鹿徐行,

遂於此地營造伽藍, 名白鹿薗寺, 住持佛法]."라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은 어디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고려의 백록원사(白鹿薗寺)라는 절의 연기설화다. 백록산이라는 이름은 함경도 명천과 경성에도 있으니

콕 집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백록원사라는 절의 정체는 평양 백록산의 환희사가 아니었을지.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신상과 금은여신상.>

 

이게 뭐냐면 대성산성 성돌 안에서 발견된 건데,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으니 문자명왕보다는 조금 앞선 시대의 것이다.

아마 성을 쌓을 때에 성이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성돌 안에 함께 만들어넣었던 것이겠지.

돌함의 길이가 15.7cm이고 너비가 11.5cm, 높이가 15.3cm쯤 되는 '적당한' 사이즈다.

바닥에는 '국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데 아마도 나라에서 만들었던 모양이다.

 

<금동남신상. 고려의 고등신 추모왕을 불가의 신으로 표현한 것이다.>

 

돌함을 파서 만든 감실 안에는 남신과 여신이 함께 모셔져 있었다.

남신은 도금한 청동상으로 오른손에 쥔 것은 윗부분이 불길(?)모양으로 된 석장, 왼손에 쥔 것은 여의주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산예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여신은 금판과 은판을 형에 대고 두드려서 만든 단조품인데,

앞면은 순금이고 뒷부분은 순은으로 서로 맞붙여서 만들었다.

은으로 만든 타원형의 연화대 위에 앉아있다.

 

<금은여신상. 고려의 부여신 유화를 불가의 보살로 표현했다.>

 

불교는 인도에서부터 전래되어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에 퍼져나가면서

각지의 토착 종교와 '습합'하고 융화되는 과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위 말하는 '신불습합'이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러 절에서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경내에 짓고 부처님과 함께 모시는 것과 비슷한데,

고려에서도 이러한 신불습합이 이루어졌다.

 

불교가 수입되기 전, 고려에서는 부여신 유화와 고등신 추모를 모셨다.

해마다 10월이면 동맹이라는 성대한 제천행사를 열고,

동굴에 모셔진 부여신과 고등신을 모셔다가 제사를 지내며 몇날 며칠을 먹고 놀고 춤추고, 즐겁게 보냈다.

훗날 왕건의 고려에서도 이때의 동맹제를 어느 정도 모방해서 팔관회의 제의를 베풀기도 했었고...

 

불교에서 모시는 석가여래와 보살과 비교해서, 부여신과 고등신은 고려에서 모시던 토착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왕이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로 격상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왕실의 선조도 부처의 한 명으로서 도리천에 올라 세상을 굽어본다는 믿음이 고려 사회에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아마 저것은 부여신과 고등신이 불교에서 모시는 33천의 한 분이 되셨다는 믿음에서 만들어졌고,

불가의 신이 되신 고려의 국신들께서 이 수도의 성을 지켜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성돌 가운데 넣어서 모셨다.

고려를 지켜주는 성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내 생각인데 사람들은 뭔가를 배우면서 겉은 배우기 쉽지만 그 속까지 배우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불교의 근본 교리란,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 그 수명이 다해서 사라진다'는 것인데,

나라라고 예외일 수가 있을까? 불교의 교리를 공부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교리를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고려라는 나라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해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텐데.

저런 것을 만들어서 봉안한다고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버텨준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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