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9060605095
세월호는 어떻게 ‘산’으로 갔나
구혜영·강병한 기자 koohy@kyunghyang.com 입력 : 2014-09-06 06:05:09ㅣ수정 : 2014-09-06 06:07:12
■ ‘모두가 죄인’ 충격·분노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5일로 143일째를 맞았다. 304명이 숨지거나 실종된 전대미문의 참사는 부실한 한국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모두가 ‘죄인’이라 자책하던 세월호 속 한국은 이제 집단적 우울은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여전히 표류 중이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0분쯤. 청해진해운 소속 6825t 여객선이 전남 진도군 관매도 서남쪽 3㎞ 해상에서 침몰했다. 29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실종된 비극적 사건이다.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대부분은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해경은 세월호에 접근했지만 구조하지 않았다. 군경은 선박 200척과 헬기 18대를 총동원하고도 구조에 실패했다. 언론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양산했다. 정부의 재난 컨트롤타워가 어딘지도 불분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부정확한 내용이 보고됐다. 한국 사회에 책임과 양심은 한 조각도 없이 실종된 듯했다.
온 국민이 TV를 통해 뻔히 지켜보는데 꽃다운 나이의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월호는 물속으로 가라앉는데 단 한 명의 생명도 구조되지 못하는 TV 화면은 비현실처럼만 느껴졌다. 국민들은 집단 우울증에 걸렸고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유족입니다”라는 반성이 이어졌다. 대한민국은 세월호 전과 후로 나눠진다고도 했다. 철저한 진상조사, 강력한 관련자 처벌, 무능한 정부의 책임을 따져야 한다는 요구는 한국 사회의 공감대였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부모들이 스승의 날인 5월15일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침몰로 함께 희생된 교사들 영정 앞으로 향하고 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검거하기 위해 검찰 수색인력이 5월21일 경기 안성시 금수원으로 진입한 뒤 교인들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 ‘근원은 유병언’ 책임 돌리기
세월호 속 한국 사회의 반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세월호에는 ‘구원파’라는 하나의 수식어만 따라붙기 시작했다. 정부·미디어가 함께 만들어낸 ‘이상 조류(潮流)’였다.
세월호 참사는 붕괴된 안전 시스템과 의식, ‘돈’의 노예가 된 자본(청해진해운)의 탐욕과 비리, 전무하다시피 한 국가기관의 위기관리 능력이 만든 비극이었다. 이 모든 것의 정점에서 안전과 생명을 담보하고 시스템을 지켜내야 할 정부의 실패와 무능은 가장 컸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침몰사고 발생 원인에만 집중했다. 세월호 참사 한 달여 무렵부터 ‘유병언’이라는 이름이 총체적 책임자로 떠올랐다. 인천지검 특별수사팀은 유병언을 전방위적으로 ‘털기’ 시작했다. 종합편성채널은 ‘YBS(유병언 Broadcasting Station)’ 방송으로 전락했다. 시신으로 발견되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8000여명의 경찰이 동원돼 그를 쫓았다. TV에선 날마다 ‘유병언 술래잡기’가 생중계됐다.
집권세력이 참사 책임 문제를 최초 침몰사고가 나게 된 원인으로만 좁히는 데 성공하면서, 침몰 후 구조 실패의 무능에 대한 책임은 가려졌다. 오히려 정부 무능에 대한 비판은 정략적 행위로 몰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돌연 ‘국가 대개조’라는 단어를 꺼내들더니 5월19일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해 해경 해체와 국가안전처 설치라는 대증요법만 제시했다. 국민의 눈은 이제 국회로 향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9일째 단식 중이던 김영오씨가 8월21일 위로차 방문한 종교지도자들을 만나고 있다.
■ ‘선거’ 뒤 좌초한 진상규명
6월2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가동되면서 국회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이 시작됐다. 기관보고를 끝낸 여야는 7월11일 ‘세월호 사건 조사 및 보상에 관한 조속 입법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기소권을 줄지를 두고 여야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수사권 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새누리당은 사법체계 근간을 흔든다며 반대했다.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하면서 여당의 자세는 더욱 완강해졌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재·보선 다음날 ‘야당 요구 수용 불가’를 천명했다. 여야 원내대표는 8월7일 11개항이 담긴 1차 합의문을 내놓았지만 후폭풍만 거셌다. 진상조사위 구성에서 세월호 참사 가족 추천 규모를 기존 2인에서 3인으로 늘린 게 전부였고, 세월호 가족이 요구한 수사·기소권 부여는 제외됐다. ‘무능 야당’ 비판이 쏟아졌다.
8월14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은 세월호특별법 교착 정국을 풀 수 있는 분기점으로 예상됐다. 교황은 세월호 참사가 남긴 아픔을 구석구석 위로했다. 부응이라도 하듯 여야는 8월19일 재합의문을 발표했다. 대통령에게 특검 후보 2명을 추천할 추천위원회 7명을 구성할 때 여당 몫 2명에 대해 야당과 세월호 가족의 사전동의를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가족은 반발했다. 이후 세월호 가족들과 새누리당은 3차에 걸쳐 회동했지만 여당의 완강한 버티기에 회동은 ‘빈손’으로 끝났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8월2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기국회 개회와 민생법안 처리를 촉구하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경제가 중요’ 잊혀진 적폐
세월호특별법 재협상안 무산 후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세월호와 민생을 분리해야 한다”고 합창했다. 경제와 민생이 중요하니 세월호 정국은 그만 접자는 압박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2일·28일 수해가 닥친 부산을 연쇄 방문했고 정홍원 국무총리는 29일 대국민담화에서 “국회는 민생경제, 국민안정, 부패청산 입법에 신경써달라”고 호소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동산 대책과 규제 완화, 세제 개편 등의 정책을 잇달아 내놨다.
세월호 가족들은 참사가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을 제정하라”며 7월14일부터 45일간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벌였다. 각계각층에서 단식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여권에선 “제대로 단식했으면 벌써 실려갔다” “세월호 참사는 해양 교통사고”라는 등의 막말이 흘러나왔다. 김씨 개인사를 트집 잡는 유언비어도 번져갔다. 국회가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나서달라는 세월호 가족의 요구는 묵살됐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월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세월호 참사는 적폐 근절의 시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특별법은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여당은 세월호 가족들을 외면하기 급급하다. ‘세월호 한국’은 어느새 ‘정쟁의 산(山)’에 걸린 채 다시 좌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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