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3251455005&code=900306&med=khan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8) 고구려의 옛 성터를 찾아서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3-25 14:55:00ㅣ수정 : 2009-08-19 11:35:11
705년 격동의 역사 지켜낸 불패의 성곽
외딴 곳에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 같은 애달픈 심정을 삭이면서 우란하오터조선족중학교를 떠난 일행은 옛 고구려 성터로 향했다. 고맙게도 현지 출신의 두 분 어른이 오늘 안내를 맡아주시겠다며 일행과 함께 떠났다. 한 분은 이 조선족중학교에서 25년간이나 교사로 봉직하다가 정년퇴직하신 현철호(玄哲豪) 선생이다. 선행 여행자들로부터 소개를 받고 선생이 살고 있는 중학교 가족아파트를 찾아갔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서 조금은 허름해 보이지만, 2층에 자리한 선생의 집은 깔끔하고 포근하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풍채가 좋은 몸매를 지닌 선생은 반갑게 맞아주신다. 같은 학교 교사 출신의 수더분한 사모님과 얌전한 따님과도 인사를 나눴다. 찾아온 사연을 말씀 드리자 현 선생은 일언지하에 동행을 수락했다. 선생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이며 필자와는 옌볜 룽징중학교의 후배뻘 동문이다.
고구려 옛 성터인 ‘고성둔’을 둘러보고 있는 답사팀. 앞쪽에 붉은 글씨로 쓰인 표지석도 보인다.
다른 한 분은 박안서(朴安緖) 선생이다. 중학교 정문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일행이 한국 여행객인 줄 아신 선생은 대뜸 다가와서 인사를 건넨다. 진남색 모직 정장에 보라색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와 색안경까기 받쳐 쓴 멋진 노신사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데 할아버지 때 이곳에 왔으니 조선족 치고는 제법 토박이인 셈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행이 찾아가는 구청툰(古城屯)에 살았었는데 지금은 자식을 따라 시내에서 살고 있다. 필자와 동연배인 박 선생은 최근에 받은 큰 수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 걸을 때면 기우뚱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을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오래 살던 고장이라서 구청툰에 관해서는 손끔 보듯 훤히 꿰뚫고 있다. 가는 길에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어디가나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목적지까지는 5㎞ 남짓한 거리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고성둔’(古城屯, ‘옛 성터가 있던 곳’이라는 뜻)이란 표지석이 눈에 띈다. 뜻밖에도 표지석은 한글과 한문으로 씌어 있다. 원래는 70여호의 조선족들이 살면서 소학교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떠나가 버리고 몽골족 몇 가족만 남아 있다. 그중 적잖은 사람들은 한국에 손품 팔러 갔다고 한다.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허물어진 폐가의 뜰에는 이름 모를 잡초만이 무성하고, 녹 쓴 농기구와 가재들이 이리저리 나뒹군다. 소학교도 자리만이 휑뎅그렁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옛 집터 앞에서 박 선생은 두 손을 허리춤에 괸 채 한참 동안 망연자실한 듯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혹여 손때 묻은 쟁기 하나라도 찾아보려는 듯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다들 폐허의 그 쓸쓸함이나 허전함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설상가상으로 본래 벼농사를 하던 마을인데, 위쪽에 댐을 짓는 바람에 물이 말라서 지금은 밭농사만 한다.
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성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성 안을 드나들기 위해 빼놓은 토막길 입구에 ‘시중점문물보호단위’란 시멘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판 뒷면에는 유적에서 20m 바깥까지만 접근이 허용되며, 위반하면 형사처벌을 한다는 경고문이 적혀 있다. 그저 경고일 뿐, 성터 이곳저곳에는 사람들과 짐승들의 발길로 다져진 오솔길이 갈기갈기 뻗어 있다. 아직까지도 지상에서 3m 높이로 남아 있는 치성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성의 한 변 길이는 300m가 족히 되므로 면적은 어림잡아 9900㎡(3000평)는 될 성싶다. 지금은 몽땅 옥수수 밭이다. 옹성은 분명치 않으나 치성만은 뚜렷하게 약 40m 간격으로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움푹 파인 웅덩이 단면에는 희끄무레한 석회와 자갈이 섞인 지층이 나타난다. 이 성터에서는 관인이나 기와. 촛대. 돌절구 같은 고구려 유물들이 적잖게 나왔다. 일찍이 1933년 소련 고고학자 렐리페프는 이곳을 탐방하면서 현지 주민들로부터 고구려성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여기서 말 재갈과 같은 여러 가지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전한 바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이 성은 고구려 옛 성터임에는 틀림없다. 이어 일행은 여기서 서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공주령성을 찾았다. 질러가는 좁은 길에 들어섰다가 차가 그만 가로 파인 홈에 걸려 나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내려서 걷기로 하고 차는 빙 에도는 길로 따라 오기로 했다. 자갈과 모래로 다져진 포장길 양 옆에는 우수수 낙엽을 흩날리는 포플라 가로수가 쭉 늘어섰다. 5리쯤 되는 곧은 길이다. 다들 며칠간 차로만 이동하다가 탁 트인 천고마비의 창창한 가을 하늘을 이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걷는 기분은 마냥 상쾌하다.
길 한편에는 깊숙이 파인 수로에 저수조가 띄엄띄엄 있다. 논밭에 대는 물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도 벼농사를 짓는다. 아마도 그 옛날 이곳에 정착한 우리네 동포들에 의해 시작됐을 것이다. 지금은 떠나간 동포들을 대신해 몽골인들이나 한인들이 이어가고 있다. 북위 47도나 되는 이 고장에서 벼농사를 짓다니, 범상한 일이 아니다. 원래 벼는 생태적으로 고온다습한 남방 작물이었으나 벼의 특이한 자연순화력을 포착한 우리네 조상들은 여기와 같은 한랭지대에서도 재배를 성공시켰다. 발해 때에는 이보다 더 북쪽인 53도의 상경에서까지 질 좋은 쌀을 생산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1만4000년 전에 탄화된 볍씨 59톨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벼의 원조국이 된 셈이다. 필자는 몇 년 전에 펴낸 한 책에서 이 볍씨를 아시아 벼의 쌍벽을 이루는 ‘인디카’나 ‘쟈파니카’에 앞선 ‘소로리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또 하나 우리의 명물 벼가 세계문화유산 속에서 차지해야 할 응분의 위상을 실증해 주는 이 현장에 와보니 감회가 더욱 새롭다.
현지 안내를 맡은 현철호 선생(가운데)과 박안서 선생(왼쪽), 필자(오른쪽).
그새 지물(地物)이 많이 바뀌어 현 선생이나 박 선생도 헛갈리는 모양이다. 때마침 옌칭(燕靑)이라는 젊은이가 나타나 모터카를 타고 앞장서 길을 안내한다. 그는 한 가게 앞에 모터카를 세워놓고 우리더러 내리라고 손짓한다. 그를 따라가보니 가게 앞에 큼직한 돌절구 하나가 비스듬히 놓여있다. 수도 지안(輯安)을 비롯한 여러 곳의 고구려 성터에서 나온 돌절구와 신통하게도 같다. 고구려인들이 살았다는 증거다. 여기서 500m쯤 더 가니 말로만 듣던 공주령 성터가 눈앞에 펼쳐진다. 성터의 입구에는 높이 2m쯤 되는 유적보호 안내판이 서 있다. 글자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어 버렸다. 입구에서 약 700m의 지점에 있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아스라이 보인다. 바로 그곳이 공주묘 자리로 알려져 이 성을 공주령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름 모를 한 위인의 묘라고도 한다. 유물은 다 도굴되어 텅 빈 상태라고 해서 가보는 것을 포기했다. 성은 얕은 언덕바지에 2~3중으로 구축되어 있다. 아마 외성과 내성인 듯하다. 규모는 구청툰 성터보다 훨씬 크다. 약간 두드러지게 지은 치성도 몇 군데서 보인다. 성벽 안팎 어디서나 연대를 가늠할 수 없는 기와 조각이 눈에 띈다. 개중에는 채색무늬 조각도 있다. 너나없이 하나씩 주워들고는 ‘고구려를 발견했다’고 흥분한다. 입구 정면에서 서북쪽으로 10리쯤 되는 대흥안령의 기슭에는 사각형 취락 유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공주령성을 일명 ‘사방(四方)유적’이라고도 하는데, 두 곳 다 고려인들이 살았던 유적지라고 일흔 여덟의 한 현지 노인은 귀띔한다. 내내 곁을 떠나지 않던 옌칭은 헤어지면서 우리와의 만남을 기리고자 자기 이름 두 자를 사인으로 남겼다. 소박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훈훈하다.
이렇게 우리는 고구려의 옛 성터에서 고구려인들의 숨결과 체취가 묻어있는 현장을 둘러봤다. 비록 세월의 풍상 속에 그 숨결과 체취가 희미해지고 바래가고는 있지만, 아직은 의젓하게 우리 겨레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으며, 우리의 마음 한 구석 빈칸을 알차게 메워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옛 성터를 찾아 나선다. 지금까지 랴오닝성이나 지린성, 그리고 압록강 연변과 한반도 중부까지 이르는 광활한 고구려의 고토에서 찾아낸 주요 성터만도 무려 170여곳을 헤아린다. 고구려인들은 요소마다에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아 나라를 지켜냈다. 그래서 고구려를 가리켜 ‘성곽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 내몽골 땅에도 훙산문화 지역과 대흥안령 일원에서 지금까지 알아낸 고구려 석관이 10여곳에 달한다. 아직 연구의 미흡으로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은 고구려의 축성사뿐만 아니라, 강역의 경계라든가 북방과의 관계 등 고구려의 숨겨진 역사를 밝혀내는 데서 자못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란하오터시 부근 공주령 성터에서 발견된 고구려 기와.
사실 우란하오터시 부근은 고구려 유적의 밀집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청툰이나 공주령 성곽 말고도 동쪽으로 핑안진(平安鎭)이나 바이청(白城, 지린성 경내) 지역에서도 여러 개의 고구려 마을과 성터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고구려 창건의 씨앗이 돋아난 부여가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건국자 주몽은 북부여 왕 금와의 궁궐에서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가 낳은 알을 깨고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렸다. 영특하고 백발백중의 명사수로 자란 그에 대한 부여 왕자들의 모해가 우려된다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은 주몽은 그곳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졸본(卒本, 현 랴오닝성 환인) 땅에 이른다. 그곳에서 부여의 또 다른 계파인 ‘졸본부여’를 신력으로 제압한다. 그리곤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지었으며 성을 고씨로 삼았다. 기원전 37년, 약관을 갓 벗어난 나이에 등극한 주몽(동명성왕)은 주변국들을 병합해 동아시아의 대국 고구려의 터전을 닦아놓았다. 그의 건국 성업은 수많은 불패의 성곽에 의해 계승되고 지켜졌다. 대륙을 향해 웅비했던 고구려의 위대한 저력 밑바탕에는 튼실한 성곽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현장 답사에서도 목격했지만 고구려의 축성기술은 대단히 우수하다. 크고 단단한 돌로 기초를 닦고 그 위에 돌들을 정연하게 쌓아올리는 석루(石壘)식으로 산 정상을 따라 기슭까지 고리 모양을 이룬다. 석루와 더불어 성 위에 나지막하게 쌓는 치성(雉城, 일명 성가퀴, 城堞)은 고구려성만이 갖는 특징이다. 공주령성에서 보다시피 산세를 잘 이용해 대체로 3면이 산 또는 절벽으로 둘러싸이게 하고 남면은 경사가 완만한 낮은 곳을 택해서 지세 상 공수(攻守) 양면에 유리하도록 했다. 웅장하면서도 정밀한 축성에는 건축공학 상의 많은 지식이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발달한 축성술과 뛰어난 성곽전을 자랑해 왔다. 수십만의 수·당 침략군도 고구려의 성곽 밑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성곽의 나라’ 고구려의 장장 28대 705년의 격동적인 역사는 이웃들과 자웅을 겨루는 대결의 역사다. 대결에서 때로는 자신을 방어하고, 때로는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루로서의 성곽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성곽은 전쟁의 최전선 초소일 뿐만 아니라, 국토의 강역을 지정하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서북 경계를 랴오닝성이나 지린성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더 서북쪽으로 대흥안령 일원, 오늘의 동북 내몽골 지역까지 멀리 잡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고구려의 국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작금 중국의 역사 조작 ‘동북공정’을 허물어버리는 데 중요한 일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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